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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항일무장투쟁의 진실.. 마지막편.
분류: 한국사
이름:  김경찬


등록일: 2019-12-16 00:06
조회수: 245 / 추천수: 0




(Part 2)         


Kim Il-sung is most importantly imprinted as the main culprit of the Korean War, which brought about national tragedy. Isn't even the objective evaluation of him for the last half century difficult? If so, why should we come back to reflect on Kim Il-sung and who he is?       Jilin City, China This is where Kim Il Sung once spent his growth. In 1927, Kim Sung-joo, a 15-year-old boy, went to Yumunmun Middle School on the banks of the Songhwa River. After that, she went to various places through her mother's recommendation.



(제 2편) 

 

김일성은 무엇보다 민족 비극을 불러온 한국전쟁의 주범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반세기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조차 어렵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삼 김일성, 그가 누구인지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중국 길림시,

   

이곳은 김일성이 한때 성장기를 보냈던 곳이다.

   

1927년, 15살 소년 김성주는 송화 강변에 위치한 육문중학으로 진학하는데, 1912년 평양 대동군에서 태어난 그는 3.1운동 직후 가족과 만주로 이동한다.

   

이후 여러 곳을 거쳐 어머니의 권유로 육문중에 진학했다고 한다.



This mundane period had a decisive influence on the boy's life path later on. There is a statue of Kim Il-sung, not long since it was built, on the campus where the school building remains. Yukmunjoong is said to have been the prestigious Chinese people, and Kim Il-sung's fluent Chinese is also learned here.       The boy Kim Il-sung first became aware of communist ideology at this time, and he was active in boys' associations. Son Won-tae, a close friend of his childhood, He recalled the days of Kim Il Sung.       Kim Il-sung invited her childhood friend Sun Won-tae to settle in the United States every year since 1991. He welcomed Son Wontae more than anything because he was the son of Pastor Sohn, who was considered a life saver.    In the fall of 1929, When Kim Il-sung was imprisoned in Jilin prison, Pastor Sohn, who was a nationalist, saved him. This incident marks a turning point in life as a result of dropping out of physical education.


이 육문중 시절은 훗날 소년 김성주의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당시의 학교 통합 건물이 남아있는 교정에는 세운지 오래되지 않은듯한 김일성 동상이 서있다.

   

육문중은 주로 중국인들이 다니는 명문 중이었다고 하는데 김일성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도 이곳에서 익힌 것이라고 한다.

 

소년 김일성은 이 시절 처음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는데 소년회 등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절친한 교우였던 손원태씨,

그는 김일성과 지냈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은 지난 91년부터 매년 미국에 정착한 어린 시절의 친구 순원태를 초청했다고 한다.

   

그가 무엇보다 손원태를 환대한 것은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던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29년 가을,

   

김일성이 길림 감옥에 수감됐을 때 민족주의자였던 손정도 목사가 그를 구명해 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육문중을 중퇴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Kim Il Sung ... It was known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that he entered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Japan invaded Manchuria and occupied Manchuria with great power. Then all over Manchuria began to resist movements.       Yanbian Autonomous Region, At that time, 8 to 90 percent of the residents of the Gando region were Koreans, which was a very harsh time for them. In Ando County, Yanbian Autonomous Region, there is a monument that tells the history of the anti-Japanese guerrillas.       Also known as Myeongwol-gu meeting In December 1931, about 40 Communists from the Chinese Communist Party of the region gathered to resolve the creation of an anti-Japanese guerrilla force. In respons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the flare of the full-scale anti-Japanese strike was ignited.


김일성...

   

그가 항일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알려져 있다.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해 나갔다.

   

그러자 만주 곳곳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들이 일기 시작했다.

 

연변 자치구,

   

당시 이곳의 간도 지역은 주민의 8~90%가 조선인이었는데, 그들에게도 이 시기는 참으로 혹독한 시절이었다.

   

바로 이곳 연변 자치구 안도현에는 항일 유격대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명월구 회의라고도 불리는 일명 옹성라자회의,   

1931년 12월, 이 지역의 중국공산당 소속 공산주의자 40여 명이 모여 항일 유격대 창설을 결의한다.

   

일제의 만주 침공에 맞서 본격적인 항일 유격투쟁의 신호탄이 점화된 것이다.



At that time, there was a record of Kim Il-sung in the official documents of Japanese imperialism. Kim Sung-joo, Kim Il-sung, appeared to have been a member of the organization of the Songsong and Ando region at that time. This is a passage that tells the story of Kim Il-sung who left Jilin.       It was around this time that Kim Il-sung, who came to Manchuria, organized an anti-Japanese shortstop dongdongdae. Following the resolution of the meeting, he tried to organize the guerrillas and hides in Sosaha, Ando County. There is a good reason why he decided to establish a base near this Muju village.


그 즈음 일제의 관원 자료에는 김일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김성주, 즉 김일성은 당시 무송, 안도 지방의 조직 위원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길림을 떠난 김일성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주로 건너온 김일성이 항일 유격 별동대를 조직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회의 결의에 따라 유격대를 조직하려던 그는 안도현 소사하 지역으로 숨어든다.

   

그가 이 무주마을 근처로 근거지를 정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After his father Kim Hyung-jik died, his mother Kang Ban-seok, who had been living apart from his junior high school days, lived here. His mother was said to have lived with his brothers in a secluded house at the time. The house where Kim Il-sung's mother lived turned into a paddy field and no trace remained. However, until the mid-70s, the mother's tomb was still there, and he later moved to North Korea.       The villagers knew the monumental place that Kim Il Sung organized the first anti-Japanese barrage. Under a large pine tree on a ridge far away, he gathered 16 young men and organized an anti-Japanese barrage. There is a monument under the pine tree, and the inscription states that the April 25, 32, anti-Japanese regiment was founded.       Although North Korea's founding of the Korean People's Army was February 8, 48, it is said that it is to commemorate the day when the creation of the People's Army was changed to April 25. But the formation of the guerrillas in Ando, unlike North Korea's claim, was not his own move.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한 후 육문 중학 시절부터 따로 지냈던 어머니 강반석이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외딴 집에서 그의 동생들과 기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의 어머니가 주거했던 집터는 논으로 변하고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중반까지도 어머니 강반석의 묘는 이곳에 있었는데 이후 북한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김일성이 최초로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다는 기념비적 장소를 알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서 그는 16명의 청년들을 모아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소나무 아래에는 기념비가 서 있는데 비문에는 32년 4월 25일 항일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이 조선 인민군을 창설한 날이 48년 2월 8일인데도 불구하고 인민군 창설 일을 4월 25일로 바꾼 것도 바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안도에서의 유격대 결성은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독자적 행보는 아니었다고 한다.



This is an undisclosed document in which Kim Il-sung is recorded in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the 30s. According to him, Kim Il-sung joined the Communist Party in 32 years and seems to have received considerable trust among his troops. In 32,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of Yang Se-bong, a nationalist group, visited Kim Il-sung, who organized the Byeoldong University.       Kim Il-sung, who crossed the border from Yanji to Ando, organized a military camp, and later joined by the Chinese Communist Party's Wang Qing Raid.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the anti-Japanese guerrilla activity became active, and the Japanese imperialists were frustrated by following large groups.       As a result, most anti-Japanese armed forces entered the rugged mountainous regions and engaged in guerrilla warfare. The Wangcheong Ranger, which Kim Il-sung joined, was also establishing a foothold at Sowangcheong's peak.


이것은 30년대 중국 공산당에 김일성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미공개 문서이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은 32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부대원 사이에 상당한 신임을 받은 듯하다.

   

32년, 민족주의 계열인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별동대를 조직한 김일성이 찾아오는데 양세봉 밑의 참모장이었던 김학규는 자서전에 그가 공산청년 수 십 명을 데리고 와 무기를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

 

연길에서 안도로 건너가 유격대를 조직한 김일성은 이후 조선혁명군과의 연합이 좌절되자, 중국 공산당 소속의 왕청유격대로 합류한다.

   

만주사변 이후 항일 유격대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초조해진 일제는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항일 무장 세력들이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이게 되는데, 김일성이 합류한 왕청유격대도 소왕청 첨아산 기슭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In the spring of 1933, Sowangcheong battle, one of North Korea's Kim Il-sung's anti-Japanese warfare, is fought. Japanese troops attacked the command post behind Peaks Mountain. The same is still very proud.       At the time, there were about 100 Wangcheong guerrillas who had Kim Il-sung, more than 10% of whom were Koreans, who won the victory after three days of intense fighting. It had favorable terrain conditions to detect the Japanese attack in advance.       Japanese anti-Japanese guerrillas formed a village called a short beneath the mountain to provide food and other supplies. At the time, there was a well used by villagers from the headquarters, and there is a monument built by the Chinese government on the hillside, which confirms that there was a base for anti-Japanese clearance.


1933년 봄,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유격 전과 중 손에 꼽는 소왕청 전투가 벌어진다.

   

첨아산 뒤쪽 유격대 사령부를 일본군이 공격한 것이다.

   

바로 그 첨아산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이 있던 왕청유격대는 100여 명이고, 그중 10% 이상이 조선인이었는데 이들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이끌어 냈다.

   

이것은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알아내기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항일 유격대들은 산 아래 유격호라는 마을을 결성해 식량 등 물자를 조달했다고 한다.

   

당시 사령부 터에는 마을 사람들이 쓰던 우물도 있었다고 하는데 위쪽으로 한참을 올라간 산 중턱에 이곳에 항일 유격 근거지가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중국 정부가 세운 비석이 있다.



The monument,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local government in Wangqing County in 1987, is said to have existed as a base for play since December of 3232. However, after the battle of Sowangcheng, Wangqing County guerrillas moved their base.       In the 30s, the Manchurian region was home to the Korean Revolutionary Army,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and the Wangcheong Reservoir, which had Kim Il Sung. And at this time alliance between them was active. The most representative of these is the Battle of Dong-hyun Hyun-sung, which was united and victorious by the Wang Cheong Regiment and Kim's independent army.       Triumphs were also experienced by Kim Il-sung who was victorious over and over. In the mid 30's, the so-called Minsadan incident occurred when the anti-Japanese struggle forces among Koreans in Gando were sacrificed. This is the case of the anti-Japanese struggle that caused the Koreans to be distressed by the spies as the Japanese imperialists separated the Koreans from the Chinese.


87년 왕청현 지방정부가 세운 비석에는 32년 12월부터 유격 근거지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소왕청 전투를 끝으로 왕청현 유격대는 근거지를 옮긴다.

 

30년대, 만주지역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그리고 김일성이 있던 왕청유격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들 간의 연합도 활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년현성 전투인데 김일성이 지휘하던 왕청유격대와 동천의 독립군들이 연합, 대승을 거뒀다.

 

승전을 거듭하던 김일성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30년대 중반, 간도 지역 조선인 항일투쟁 세력들이 대거 희생되는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도 그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는 차별 정책을 쓰면서 조선인들이 첩자로 몰려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되는 항일 투쟁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Kim Sun-sung, who was active in the Kim Il-sung unit, is said to have even been driven to the Minsadan for eating corn seeds. Many Koreans were sacrificed as spies, but Kim Il Sung could escape the crisis. His boss, a Chinese executive, said it was a windbreak. The Minsadan incident was the biggest crisis for Kim Il-sung, but it was an opportunity for him. At the expense of many of the Korean-American strugglers, he was naturally in his twenties.       Since then, anti-Japanese armed forces in Manchuria have been reorganized into a large force called the Northeast Anti-Japanese Army in 36 years. This anti-Japanese army led the anti-Japanese struggle in Manchuria in the mid 30's in the form of a cooperative federation.       The Northeast Anti-Japanese Army, which had organized up to 11 counties throughout Manchuria, was once the most threatening threat to Japan in terms of size and power. During this period, Kim Il-sung's guerrillas were based on Koreans, but there were not many women.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했던 김선은 심지어 옥수수 씨앗을 먹었다는 이유로 민생단으로 몰렸다고 한다.

   

첩자로 몰려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됐지만 김일성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의 상관인 중국인 간부 주보중이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고 한다.

   

김일성에게 최대 위기였던 민생단 사건,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기회가 됐다.

   

상대급인 많은 조선인 투쟁가들이 희생되면서 자연히 20대인 그가 상급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후 만주지역의 항일 무장세력들은 36년,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대규모 부대로 재편된다.

   

이 항일연군은 조중연합 형태로 30년대 중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주도하게 되는데 김일성 등 조선인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만주 전역에 걸쳐 11개군까지 편제를 갖춘 동북항일연군은 한때 그 규모나 세력 면에서 일제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시기 김일성이 속한 유격대는 조선인들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여성대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When Kim Il-sung was the second president of the Army's second army, Kim, who was in the unit, later recalled the grievances of women. It was because the same activities were given to male troops. In the 30s, Army Group 2, commonly referred to as Kim Il-sung's troops, moved its activities to the Baekdu-san Changbai County. At the time, there was an article on the newspaper saying that Musong was attacked by the opposition forces near the border. One of the leaders who attempted this was Kim Il Sung. At this time, Kim Il-sung receives attention from the Japanese army to send spies into the unit to spy out.       It was during this second president of North Korea's Anti-Japanese Army, the second Army, who attacked the Bochonbo, the most prominent North and South Korea. Seven police officers were killed, six were wounded, and none were larger than other battles. However, it was a shocking event at that time just because the Korean armed forces invaded Korea and invaded Japan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ppression.


김일성의 2군 육사 사장으로 있던 시절, 그 부대에 있던 김선은 여성대원들의 고충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남성 부대원과 똑같은 활동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30년대, 흔히 김일성 부대라고 불렸던 2군 육사는 백두산 장백현지구로 그 활동 무대를 옮긴다.

   

당시 신문지상에는 국경 근처 무송 등이 야합 세력에 의해 습격 당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를 시도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일본군으로부터 부대 안에 첩자를 보내 정탐을 할 만큼 주목을 받는다.

 

북한이 가장 대내외에 내세우는 보천보를 습격한 것도 이 동북항일연군 제2군 육사 사장 시절이었다.

   

추격 경관 일곱 명 사망, 여섯 명 부상, 다른 전투에 비해 결코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조선인 무장세력들이 국내에 침공, 일제에 일격을 가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At that time, the Northeastern Anti-Japanese Army was organized into the 1st ROG, mainly in East and South Manchuria, the 2nd ROG in Giljong area, and the 3rd ROK in North Manchuria. However, in 1939, when the Japanese army organized and attacked a large-scale Kando squadron of 75,000 people, the Northeast Anti-Japanese Army Coalition, which had once reached 30,000, was reduced to about 1,400.       At that time, Kim Il-sung's two-sided army raided the timber cattle and fought back with the tombs that followed after him here. The Kim Il-sung unit is said to lure Maeda troops back to the mountain and ambush them.       On the hillside stands a monument built by the Chinese government that looks quite old. It was on March 25, 40, when the Manchurian armed forces were getting deeper. Kim Il-sung's position at that time was the team leader for Hangil-gun 1-ro-gun. The inscription says that more than 120 Maeda troops were annihilated, but this is slightly different from the official Japanese data.


당시 동북항일연군은 동, 남만주을  중심으로 한 제1로군, 길종지역의 2로군, 북만주의 3로군 편제였다.


그런데 1939년 일본군이 7만 5천 명 규모의 대규모 간도 토벌대를 조직, 공략에 나서면서 한때 3만 명에 달하던 동북항일연군은 1,400여 명 정도로 축소되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 무렵 목재소를 습격하고 달아나던 김일성의 2방면 군은 이곳 홍기하에서 그 뒤를 쫓던 토벌대와 또한번 격전을 치르게 된다.

   

김일성 부대는 뒤를 쫓는 마에다 부대를 산 쪽으로 유인, 매복해 있다가 섬멸시켰다고 한다.

 

산 중턱에는 세운 지 꽤 오래돼 보이는 중국정부가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만주 무장세력들의 패색이 깊어가던 40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김일성의 당시 직책은 항일연군 1로군 2방면 팀장이었다.

   

비문에 마에다 부대 120여 명을 섬멸했다고 되어 있으나 일본의 공식 자료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Japanese official data show that 58 people were killed and 27 were wounded in a close encounter with Kim Il-sung. As the massive Japanese colonial rule began, the Northeast Japan Anti-Japanese Army collapsed and the armed struggle in Manchuria began to decline.    As the relentless work of Japanese imperialism also reduced the surrender of major anti-Japanese forces. Yang Jung-woo, the commander of Kim Il-sung's 1st ROK Army, was killed deadly without seeing Japan's defeat. At that time, the number of such deaths and returnees was estimated at 3,000.       October 1940,    Kim Il-sung, who was active in Manchuria, led a dozen or so troops to cross the border to the Soviet Union. Coming to the Soviet Union, he stayed in Khabarovsk via Broshirov. Ju Bo-jung, who was a boss during the 88th Brigade, writes in his diary that Kim Il Sung arrived in the Soviet Union with 16 members.


일본의 관원 자료는 김일성 비가, 즉 공비 전과의 접전으로 58명이 전사하고 27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의 대규모 토벌이 시작되면서 동북항일연군도 붕괴되고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제의 집요한 공작으로 항일세력 주요 간부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

   

김일성이 속한 1로군 사령이었던 양정우도 결국 일본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처참하게 사살되고 말았다.

   

당시 이런 사망자와 귀순자가 3,0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1940년 10월,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부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향했다.

   

소련에 건너온 그는 브로시로프를 거쳐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렀다.

    

이곳 88여단 시절의 상관이었던 주보중은 당시 그의 일기에 김일성이 대원 16명과 함께 소련 현지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다.



The 88th Brigade, assigned to Kim Il-sung, was a headquarters of the Soviet Far East Front, mainly led by the North Korean Anti-Japanese Army Retreat. Kim Il-sung lived here with Kim Jung-sook and Kim Jong-il.       The chief intermediary was the brigade of the 88th Brigade and Kim Il-sung, the commander of the 1st Battalion, most of which were Koreans. The Soviet secret document contains no record of him, whose Soviet name was Chenzichen. It was here that Kim Il-sung, who had settled in the Soviet Union, met Choi Hyun and An-gil,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rocess of seizing power after the liberation.       During his stay in the Soviet Union, Kim Il Sung was liberated. For some time, however, North Korea did not recognize his stay in the Soviet Union from the end of 40 years until liberation. At the time of liberation, he returned to Japan after defeating Japanese troops who retreated in Manchuria.


김일성이 배속된 88여단은 소련 극동전선 산하 사령부였는데 소련으로 퇴각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김정숙, 김정일 등과 함께 생활했는데 주보중 등 상관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주보중은 이 88여단의 여단장, 김일성은 대다수가 조선인인 제1대대의 영장, 즉 대대장이었다.

   

소련군 비밀문서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은데 그의 소련 이름은 첸지첸이었다.

   

소련에 안착한 김일성이 해방 후 그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최현, 안길 등을 만나게 되는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소련에 머물던 그 시기, 김일성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한동안 북한은 그가 40년 말부터 해방 당시까지 소련에 체류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당시에도 만주에서 소유격대 활동을 하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물리치며 귀국의 장도에 올랐다는 것이다.



Was it a burden for him to be a Soviet officer? However, Kim Il Sung's later memoirs admit that they returned home through Wonsan Port on September 19, 1945, about a month after liberation.    After liberation, independence movements from other countries entered Korea one after another. What was the perception of Kim Il-sung in Korea at that time? A survey conducted by a right wing group in 1945 suggests his status in the liberation regime.       He was ranked 6th after Yoo Yun-hyung, Rhee Syngman, and Kim Gu, who were suitable as leaders. He was also ranked first in the cabinet as the Secretary of Defense of the Cabinet. Soon after the liberation, the public appreciated his anti-Japanese struggle.


주체사상을 내세웠던 그에게 소련군 장교로서의 입성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러나 이후에 발간된 김일성 회고록은 해방이 되고 한 달쯤 뒤인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귀국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이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속속 국내에 입성했다.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1945년 한 우익단체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해방 정국에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게 한다.

 

지도자로 적당한 인물에 여운형, 이승만, 김구에 이어 6위에 올랐다.

   

또 내각의 국방부 장관격인 군무부장 1순위로 뽑히기도 했다.

   

그만큼 해방 직후 대중들은 그의 항일 투쟁 경력을 높이 평가했다.

 


Kim Il-sung, 33, It was because of this anti-Japanese career and the support of the Soviet military that he was able to emerge as the top leader in the north over the rival political forces.       At the time of liberation, there was a nationalist Jo Man-sik, who led the Democratic Party. And there was a strong rival Park Heon-young of the same Communist line. However, since the administration of trusteeship began, Cho Man-sik was the representative of Ban-taek, and Park Heon-young did not gain the confidence of the Soviet military in that the United States was associated with the pearling South Korea.       Kim Il-sung, who received the full support of the Soviet military from the liberation government, finally established and won the Prime Minister's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on September 9, 48.    After a while, he triggered toward the south of the Korean peninsula.    Kim Il-sung, his name has a condensed history of division.


33살의 김일성,

   

그가 쟁쟁한 정적들을 누르고 이북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항일 경력과 소련 군정의 지원 때문이었다.

 

해방 당시 북에는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이 있었다.

   

그리고 남에는 같은 공산주의 계열의 강력한 라이벌 박헌영이 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정국이 시작되면서 조만식은 반탁의 대표 주자라는 점에서, 박헌영은 미국이 진주한 남한을 연고한다는 점에서 소련 군정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해방 정국에서 소련 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마침내 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설, 수상에 오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한반도 남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김일성, 그의 이름에는 분단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Half a century after the division, the summit of the two Koreas finally met. It was the first step from the age of division to the age of unification. And today, small changes are perceived in our society.       So-called Kim Il Sung lectures appeared on university campuses dealing with Kim Il Sung's anti-Japanese struggles. Surprisingly, only a small number had heard of Kim Il-sung's fake theory. It was not a concern for those born in the 80's. It may have been because he had already heard it, but many students acknowledged his anti-Japanese struggle.       The results of a survey of 1,400 netizens through imbc last January also show that the solid wall of Kim Il-sung's fake theory, which has dominated our society for the past half century, is breaking down. Although netizens are young, 49% of respondents said that Kim Il-sung's anti-Japanese struggle would be true.


분단 반세기 만에 마침내 남북 정상이 만났다.

   

그것은 분단의 시대에서 통일의 시대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대학 캠퍼스에 김일성의 항일 투쟁들을 다루는 이른바 김일성학 강의가 등장한 것이다. 

  

의외로 적은 수만이 김일성 가짜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80년대 태어난 이들에게는 관심사도 아니었다.

   

이미 강의에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그의 항일 투쟁을 인정했다.

 

지난 1월 imbc를 통해 네티즌 1,4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의 결과도 지난 반세기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김일성 가짜설의 공고한 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네티즌들의 연령대가 젊은층이기는 하지만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이 사실일 거라는 응답이 49%에 달했다.



Moreover, more than 50% of the respondents said that if true. The wind of change is happening.       In the 40s, when Kim Il-sung stayed in the Soviet Union, there was a struggle against the Liberation Army of the Provincial Government of Chongqing. The gloomy Japanese colonial days, There were numerous nationalist anti-Japanese fighters who threw themselves into the country's liberation.


더구나 사실이라면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응답도 50%가 넘었다.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에 머물던 40년대에는 연안의 조선의용군이, 중경 임시정부의 광복군 투쟁이 있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시절,

   

조국 해방을 위해 몸을 던졌던 수많은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 투사들이 있었다.



If so, what is the most fair place to place Kim Il-sung in the big stream of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Kim Il Sung ...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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