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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이지 않고 오직 (진실,사실적인 김일성 인생,역사) 09편
분류: 한국사
이름:  김경찬


등록일: 2020-04-18 15:37
조회수: 114 / 추천수: 0




09편..


 


왕윤성이 구국군을 떠나 왕청으로 온 뒤 왕윤성의 자리에 올랐던 진한장과 참모장 호택민이 여전히 오의성의 곁에 있었으나 모두 중국인들이었던 그들은 중국인과 조선인의 관계가 여간 민감한 게 아닐 때 함부로 나서서 공개적으로 김성주를 도울 수도 없었다.


 


김성주는 이때의 일을 두고 ‘오의성과 담판했다.’고 회고하고 있지만 정작 오의성의 구국군에서 복무했던 적이 있는 중국인 노병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 사령관은 이광 별동대가 통째로 모조리 달아난 것 때문에 몹시 화내고 있었고 ‘김일성’은 오 사령관을 찾아와서 손이야 발이야 빌기만 했다.


 


담판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담판이란 관계가 대등해야 하는 법이다. 1천 명을 거느린 구국군 사령관과 1백 명을 거느린 유격대 대장이 어떻게 담판을 할 수 있는가? 무슨 담판을 한단 말인가?


 


그때 나자구를 대감자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구국군이 대감자 바닥에 쫙 널린 뒤로 유격대는 낮에 함부로 나오지 못하고 몰래 밤에만 쏠락쏠락 나다니곤 했는데 그래도 ‘김일성’만은 용감하게 대낮에 찾아왔더라.


 


오의성과 ‘김일성’은 원래부터 좀 아는 사이었다. ‘김일성’ 본인이 원래 길림 구국군 출신이었다.”


이때 오의성으로 하여금 공산당의 왕청 유격대를 받아들이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구국군이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지청천의 한국독립군과 한창 마찰이 빚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주는 이 기회를 타서 오의성을 꼬드겼다.


 


**** 여기서  과거로 가서  김일성(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의 실상을 보자..


 


김성주의 출생은 이 집안에서 경사였다. 그가 회고록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3대를 외독자로 내려오고 있었던 집안이 할아버지 김보현의 대에서부터 할머니 이보익에 의해 6남매 형제가 태어나게 되면서 열 명 가까운 대식구로 늘어나게 되었고 큰아들 김형직이 또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집안의 장손이 된 김성주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사랑에 대한 추억들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김형직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의 안온한 삶에 안주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던 그런 평범한 가정적인 젊은이가 아니었다.


 


20대라는 젊은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평양 대부흥운동 이후 한반도에서 파급되고 있었던 성경교육이 189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 땅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기독교인들의 국가자주운동과 갈라놓을 수 없었던 영향이었다.


 


이 시절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젊은 신자들 중에는 충군애국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독립협회와 협성회(배재학당의 학생회)가 생겨났고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여기에 참가하여 민권신장을 부르짖으면서 국가자주독립운동에도 앞장서게 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층에 포진해있었던 윤치호, 서재필, 남궁억, 이상재, 그리고 주시경, 이승만 등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거나 아니면 후에 모두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는 유명인들이었다.


 


일본의 침략이 한참 노골적으로 되어가던 1905년부터 벌써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고 을사늑약이 맺어질 무렵에는 기도에만 매달리지 않고 서서히 행동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최재학, 이시영, 김하원, 이기범 등의 젊은 기독교인이 격문을 살포하고 연설을 하는 등 일본 지배에 직접적으로 항거하는 일이 나타난 것이다.


 


찰스 C · 콜튼이 “위대한 사람들은 재난과 혼란의 시기에 배출되었다. 순수한 금속은 가장 뜨거운 용광로에서 만들어지고 가장 밝은 번개는 캄캄한 밤의 폭풍 속에서 나온다.”고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반도의 근대사에서 가장 암담했던 이 시절에 기독교인들 속에서 이처럼 많은 애국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경공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절 숭실중학교 같은 미션계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성경교육은 단순하게 성경을 해독하고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무렵 한국에 취재하러 왔던 영국 ‘데일리 메일’의 기자 맥켄지(F. A. McKenzie)2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 다르크,햄프턴 및 조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어쨌든 김형직은 첫아들 김성주를 보았을 때까지도 다만 평범한 조선 청년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젊은 신앙인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 김보현과 어머니 이보익은 대대로 소작농이었고 조부 김응우는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으며 부형 몇 대 안에 벼슬을 했거나 또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거나 아니면 죄를 짓고 유배되었거나 하였던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상 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없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고 그냥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열심히 일해서 굶주리지 않고 먹고 살아갈 정도의 소박하고 착실한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소박한 부모의 기질을 그대로 내리받은 김형직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정직하였으며 부지런하였다.


 


김형직의 밑으로 또 아들 김형록(金亨禄), 김형권(金亨權)과 딸 김구일녀(金九日女), 김형실(金亨實), 김형복(金亨福)을 낳은 김보현과 이보익 부부는 큰아들만큼은 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1월 만경대의 남리마을에 세워진 6년제 학교였던 사립순화학교에 다니면서 한학(漢學)에 빠진 어린 소년 김형직이 창창한 목소리로 ‘하늘 천 따지’를 노래 부르듯이 외워가면서 손에 붓을 들고 먹글씨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김보현과 이보익 부부의 즐거운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터였다.


 


이상..          10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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