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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이지 않고 오직 (진실,사실적인 김일성 인생,역사) 11편..
분류: 한국사
이름:  김경찬


등록일: 2020-04-18 20:33
조회수: 188 / 추천수: 0




11편..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청수동회의" 실제로 존재했었나?


데서 들것에 들려가겠느냐. 제 발로 보란 듯이 걸어가자꾸나."

들것을 들고 따라왔던 형권이와 형록이가 곁에서 형을 부축하였고 김형직은 아들 성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연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  장일환의 부탁



1919년, 병석에서 털고 일어난 김형직은 장대현교회 집사로 나갔다.

숭덕여학교 학생들이 장대현교회에  많이 모여들었다.

김형직은 한동안 여학교 학생들과도 종종 만남을 가지곤 했지만

그는 단 하시라도 조선국민회를 잊고 지냈던 적이 없었다. 경찰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 조선국민회 ' 라는 이름자 조차도 입에 담기를 무서워했다.



아무래도 평양에서의 조직은 재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자 김형직은 바로 평양과

멀리에 떨어진 평북 의주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장일환 역시 평양 감옥에서 옥사하기 며칠 전에 바람 쏘이는 시간을 타서 김형직과 만나 몰래 소곤거린 적이 있었다.

" 형직아, 난 아무래도 안 되겠다."

" 지방조직들은 피해를 덜 입었으니 함께 석방되면 의주 쪽으로 한번 나가봅시다."

낙담하지 않는 김형직을 바라보며 장일환은 목이 멨다.

" 난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국민회를 부탁한다."

" 형님이 안 계시면 제가 어떡한단 말입니까?"

" 내가 설사 살아나간다고 해도 이 몸 가지고는 더 뛰어다닐 것 같지 못하다. 아무리 봐도 평양에서는 조직을 복구하기는 힘들 거야. 감시가 너무 심하니."



장일환으로 부터 이와 같은 유명을 받은 김형직은 미쳐 몸을 추켜세울 사이도 없이 평양을 떠났다.

이때부터 김형직은 직업 혁명가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일단 가족에 대한 부양의 의무부터 버릴 수밖에 없었다. 침략자 일제와 싸우는 일,  그래서 나라를 되찾아보겠다는 이 일에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다.



위로 연로한 부모와 아래로는 아직 장가도 들지 않은 동생들 그리고 미처 철들 새도 없이 험악한 세상을 알아버린 어린 아들 김성주와 철부지 둘째 아들 김철주 이 모두를 아내 강반석에게 맡겨 버렸다.


그리하여 식구들은 김형직의 소식을 얻어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혹 가다가 1년에 한두 번 정도 편지를 보내오면 그게 전부였다.

한 번은 편지와 함께 " 금불환 " (금과도바꾸지않는다는뜻) 이라는 먹과 붓을 보내왔다고 김성주는 회고하고 있다. 글 공부를 잘하라고 아들 김성주에게 보내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집을 떠나 객지에서 떠돌아다니면서도 큰 아들 김성주를 가장 마음속에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주 또한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으면 그 붓과 먹으로 제일 먼저 한지에다가 ' 아버지 ' 라는 세 글자를 큼직하게 써놓았다. 김성주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우리 집 식구들은 밤에 등잔불 밑에서 편지를 돌려가며 읽었다. 형록 삼촌은 세 번씩이나 읽었다.

성미가 덜렁덜렁한 삼촌이었지만 편지를 볼 때에는 늙은이들처럼 꼼꼼했다. 어머니는 대강 훑어보고 나에게 편지를 넘겨주면서 할아버지,할머니가 들으실 수 있게 큰소리로 읽어드리라고 하였다.


학령 전이었지만 아버지가 집에서 조선어 자모를 가르쳐 준 덕에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내가 유창한 목소리로 읽어드리자 할머니는 물레질을 멈추고 ' 언제 온다는 소리는 없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고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소리로 뇌이는 것이었다. ' 아라사 ' 에 갔는지 만주에 갔는지 이번에는 퍽이나 오래두 객지생활을 하는구나.' 나는 어머니가 편지를 얼추 훑어본 것이 마음에 걸려 잠자리에 든 다음 아버지의 편지를 뜬금으로 소근소근 외워드리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할머니가 계시는 데서는 절대로 편지를 오래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  송암 오동진


한편 김형직은 압록강 연안과 북부 국경지대를 떠돌아다니면서 조직들을 복구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가는 곳마다 배신자들의 밀고로 경찰에게 쫒겼다. 하마터면 잡힐뻔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더구나 노자까지 떨어져 풍찬 노숙하게 되었는데 일단 먹고 사는 일이 급하게 되자 그가 찾아간 곳은 바로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이었다. 이 동네에 그의 친구 오동진(吳東振)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암(松菴) 오동진은 마침 한 고향의 선배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와 함께 세운 일신학교가 일제 경찰의 간섭으로 문을 닫게 되자 그것을 다시 개교하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현재는 북한의 선전기관에 의해 ‘조선국민회의 청수동회의’라고 소개되고 있는 이 동네에 와서 김형직이 한동안 편안하게 숨어 지냈던 것은 바로 오동진의 덕분이었다.


오동진과는 평양 숭실학교에 다닐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었다. 오동진을 독립운동의 길로 인도하였던 유여대(劉如大) 목사가 손정도 목사와 친하게 지냈고 일이 있어 평양에 올 때마다 꼭 대성학교에 들려서는 오동진을 불러서 함께 데리고 다녔던 탓이었다.



오동진이 대성학교에 입학하였던 것은 이 학교에서 대한제국 군인 출신의 체육교사를 초빙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이었다. 키가 작달막하여 ‘난쟁이’소리를 듣기도 하였던 오동진이었지만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가 직접 무장을 들고 일제와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국민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동진은 유여대 목사가 감옥에 가게 된 후 그와 함께 고향에 만들었던 일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청수동에 내려와 있었다. 그 후 대성학교도 바로 폐교되었다. 1907년에 개교하여 1912년에 문을 닫았으므로 실제로 옹근 3년 동안 학교를 다니고 졸업한 졸업생은 19명밖에 안 되었다. 졸업생들 속에서 이름 날린 사람들로는 오동진 외에도 한국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 서왈보(徐曰甫)와 소설 『화수분』으로 이름 날린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 전영택(田榮澤)도 들어있었다.


-주석-

유여대(劉如大) 목사는 187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민족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해 갔다. 특히 서구의 신학문에 관심을 갖게 돼 의주에서 근대식 교육기관인 일신학교와 양실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을 통한 자유와 평등 이념을 전파하면서 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정통 신학을 공부해 191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의주동교회의 담임 목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이승훈과 양전백의 권유로 3·1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참여했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고, 선생은 의주에서 대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개최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헌병에 피체 됐다. 옥고를 치른 뒤에도 민족독립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민족교육에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사진-   삭제함..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 서왈보(徐曰甫). 중앙은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유여대 목사




한편 김형직이 오동진의 도움으로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에서 매일같이 집구석에 들어박혀 『의종금감』(醫宗金鑑)과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세상은 또 한 번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조선 땅에 전해져 들어온 것이었다.

 



이상..       1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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