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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11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0-11-19 20:01
조회수: 218 /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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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게시글 아이콘[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 시리즈 시리즈란?

※  10편은 시리즈에 넣지 못하고 일반으로 올렸씀

 

11편

 

●  극동의 소련군

 

극동의 소련군은 미군과 함께 1945년 해방 전후 한반도의 정세를 주도하며 가장 큰 영향을 준 군대이다. 스탈린(1878~1953)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발탁하는데에도 극동군 사령부의 추천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6.25 남침 전쟁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관련된 극동 소련군 부대의 편성이 자주 변한데다 관련 인물들도 많고 복잡해서 정확한 내용을 알기가 쉽지 않으므로 요점만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  대일본전 이전의 극동군

 

■ 극동전선군 (Far Eastern Front)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부는 하바로프스크에 있었다. '원동방면군'으로도 번역한다.

 

1940년대 초의 사령관은 아파나셍코 (Iosif Apanasenko, 1890-1943)였고, 1943년에 막심푸르카예프(1894~1953)가 후임으로 왔다.

 

●  제88독립보병여단

 

소련으로 도피해온 만주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을 수용한 88여단은 1942년 7월 극동전선군 사령관 아파나셍코가 스탈린(1878~1953)의 명령을 받고 창설하였다. 빨치산들의 수용 문제를 타결짓고, 여단 창설의 실무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1899~1980)소장인데,그는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88여단의 운영과 해체까지 관장하였다. 안쿠지노프 대좌는 정찰부국장으로 소르킨을 도왔다.

 

김일성은 88여단에서 나움 소르킨(1899~1980) 소장의 비밀 정보원 (KGB 전신 NKVD 요원)으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여 이들의 신임을 얻었을 가능성. 이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스탈린이 그를 북한지도자로 발탁한다. 소르킨은 NKVD 수장으로 사실상 제2인자였던 리브렌티 베리야(1899~1953)의 심복이었으므로 그가 김일성을 추천한 것이 크게 작용할 수 있었다. 88여단 자체도 원소속은 국방성 아닌 NKVD 산하부대이나 소련극동군이 대신 관할하였다. 88여단 해체 후 부지도 국방성 아닌 KGB 재산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최원은 소련 고려인 출신으로 소르킨 소장 아래서 정보업무를 맡아보았고, 해방 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정찰국장을 지냈는데, 소련파 숙청 당시 투옥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감방 동료였던 인민군 소장 출신 강수봉(1925~?)이 88여단 당시 김일성의 프락치 역할에 대한 최원의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겼다. 88여단 소속의 또 다른 고려인 유성철(1917~1995)은 대대장 김일성 아래 통역관으로 있었고,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냈는데,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 두사람은 북에서 쫒겨난 입장이므로 100%믿을 순 없다.

 

그는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 북한 김일성이 같은 이름을 쓰며 공로를 가로챘다고 증언하였다.

 

●  연해주 군단 (Primorsky Group of Forces)

 

 

사령부는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에 있었다.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Primorsky Krai를 의역한 말이며 바닷가를 따라 뾰족하게 북한 쪽으로 내려온 지역이다.

 

 Primorsky는 영어로 Maritime에 해당되는 의미를 가짐.

 

●  만주와 북한 침공 시기

 

1945년 5월 대독일전이 끝나고 유럽 전선이 정리되자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병력과 장비를 비밀리에 극동지역으로 이동한다. 8월 초 3명의 원수를 극동으로 투입하고, 종래의 극동군을 대폭 개편하여 하보로프스크에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두고, 그 아래에 제1, 제2 극동전선군과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두었다.

 

  • 극동군 총사령부 (Far East Command) :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둠.

  •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습키 소련연방 원수
  • 제1극동전선군 (1st Far Eastern Front) : 보로쉴로프의 연해주 군단을 개편한 것으로 만주 동부 및 북한 전선 담당.
    사령관 [9], 군사위원 [10] 중장

  • 제2극동전선군: 종래의 하바로프스크 극동전선군을 개편한 것으로 만주 북부 전선 담당.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1894~1953)

  • 트랜스바이칼 전선군 (Transbaikal Front) : 만주 서부 전선 담당 사령관 (1898~1967)원수

 

소련은 개전 시기를 저울질하며 미·일간의 전쟁 상황을 주시하다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후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을 투하하던 날인 8월 9일 0시에 일ᆞ소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트랜스바이칼 전선 쪽에서부터 만주 침공을 개시하였고, 북한 지역으로도 침공해 들어왔다. 소련은 두번째 원폭 투하 정보도 사전에 입수하고 개전을 했을 것이다.


1945년 9월 초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심사할 때 총사령관 바실렙스키는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 1906~1973)중장과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이 그를 면접 심사하게 하고 ,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가는 수송기편을 제공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만나 테스트 해본 후 그 자리에서 북한 지도자로 낙점하였다.

 

극동군 총사령부 군사위원 쉬킨(1906~1973)은 1945년 9월 20일자의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이 잘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고, 이의 빠른 이행을 위한 방안을 제시한 1945년 12월 25일자 쉬킨 보고서의 작성자이다. 

 

군사위원(Member of Military Council)은 주로 공산국가 군대에 있는 직제로 정치문제를 담당하는 정치군인이다. 군사위원 중에는 스티코프처럼 한번도 군사훈련을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 산하로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1900~ 1979) 대장이었다.

 

●  대일본전 종전 후

 

종전후 극동군 총사령부는 해체되고, 보로쉴로프의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 군관구로,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은 극동군관구로,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트랜스바이칼-아무르 군관구로 개편되며, 각 군관구의 사령관은 각 전선군 사령관이 1947년까지 그대로 유임된다.

 

●  연해주 군관구 (Primorsky Military District)


연해주 군관구의 사령관은 키릴 메레츠코프

(1897~1968)원수였고, 종전 후 1947년까지 재임하였으며, 평양의 소련군정도 그의 관할하에 있었다. 군사위원이 테렌티 스티코프(1907~1964) 평양 소련군정을 총괄지휘하였다. 스티코프는 소속이 보로쉴로프(우수리스크) 사령부이므로 평양에 상주하지는 않았고, 수시로 평양, 모스크바, 서울을 들락거렸다. 

 

스티코프는 1945년 4월 보로쉴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왔으나 하바로프스크의 88여단과는 거리가 5~600 km 가량 떨어져 있어 해방전에는 김일성을 알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탈린이 그를 북한 지도자로 발탁하는 데는 별 역할을 한 것이 없으나, 소련 군정이 국내 기반이 전무한 김일성을 실제 지도자로 만들어가는 정치공작에는 깊숙히 간여 하였다.

 

●  극동 군관구 (Far Eastern Military District)

  • Wikipedia
  •  

해방 전에는 김일성 등을 수용한 88여단이 속했던 곳이나,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과는 관련이 없다.

 

 

800px-제2차_미소공동위원회에_참석한_미소_대표.jpg

1947.05.24 서울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미소 인사들의 비공식 촬영 사진이다. 왼쪽부터 미측 부대표 존 웨컬링(John Weckerling) 준장, 소련측 위원 코르쿨렌코(Korkulenko) 대좌, 둔킨(G. I. Tunkiv), 미 군정 정치고문 아서 번스(Arthur Bunce) 박사, 하지(Hodge) 중장, 소련측 대표 쉬티코프(T. F. Shtikov) 중장, 미국 측 대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 소련측 부대표 레베데프(N. G. Lebedev) 소장, 미국 측 위원 칼빈 조이너(Calvin M Joyner), 소련군 민정청 정치고문 발라나사프 미 군정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 미국 측 위원 로렌스 링컨(Lawrence L Lincoln) 대령.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이나 평양의 소련군정은 보로쉴로프(우수리스크)에 사령부를 둔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 군관구) 관할하에 있었다.

 

  •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 북한 점령 소련 제25군 사령관이었으나, 정치적 사안에는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 진입후 함흥과 평양 중 북한의 수도를 정하라는 메레츠코프 원수의 지시를 받고 평양으로 결정한 사람이다. 1947년 2월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후임 겐나디 펜트로비치 코로트코프 중장은 1947년 2월부터 1948년 4월까지 25군 사령관을 맡았다. 1948년 4월부터 소련군 철수 때까지 사령관은 Vasily Shvetsov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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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렌티 스티코프 :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으로 평양 소련군정 총괄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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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레베데프(1901~1991) : 제25군 군사위원으로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아 수행하는 평양 현지 정치담당 지휘자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령군정 민정청 사령관

 

아래 두 사람은 소련 군정 당시는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실무 작업에 간여했던 중견 장교들로, 소련 붕괴 후 평양 소련군정 당시의 일에 대한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중좌

 

레오니트 바신(1915~2006)소좌

 

●  소련군의 6.25 참전

 

 

대일본전 종전 후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트랜스바이칼-아무르 군관구(Transbaikal-Amur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되며 트랜스바이칼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말리노프 스키(1898~1967)원수가 1947년까지 사령관을 맡았다.

 

말리노프스키는 1947–1953년간에 극동의 3개 군관구를 통할하는 총사령관을 맡아 한국전 이전에 북한의 인민군과 중공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는 일을 했다. 한국전 개전 후에는 전쟁 상황을 늘 보고 받았으며, 참전 명령이 떨어질 지도 몰라 대기하고 있었다 한다. 또 김일성의 작전 지휘가 엉망이라 그를 모자 쓴 대위라고 부르며 경멸하였다 한다.

 

<모자를 쓴 대위>

 

2차 대전의 탁월한 장군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던 말리노프스키는 유머도 풍부해서 아침마다 버릇처럼 "그래, '모자쓴 대위'가 또 무슨일을 저질렀는가 어디보자"라면서 전날의 전황보고서를 읽곤 했다.

金日成(김일성)에 대한 원수의 이런 말투에는 前(전)소련군 대위를 차갑게 빈정대는 감정이 있었는데 당시 극동군 참모부에서는 金(김)의 별명이 이미 유행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은 6.25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공군과 고문단은 비밀리에 참전하였는데, 이들은 소련이 한국전 참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참전 용사 대우도 받지 못했다 한다. 

 

미국은 소련의 참전 사실을 알면서도 국내에 알려지면 확전 여론이 일까보아 은폐했다고 한다.

 

 

    이상..        1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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