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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 (근현대사) 13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0-11-22 16:54
조회수: 191 /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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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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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처음 전처 김혜순

 

 

 

1940년 4월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8권에 나오는 사진이다. 4권에는 《꾀꼬리》로 소문난 반일자위대원 김혜순으로만 나온다.

 

김혜순(金惠順, 1917~ ?)은 만주 빨치산 시절 김정숙 이전 김일성의 처로, 19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북한에서 살았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김일성의 처로 1940년 가을 소련으로 월경하기 직전 결혼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 김정숙 사후에 재혼한 김성애 두 사람만 인정한다. 김일성 생전에는 공개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했던 김성애마저 김일성 사후에는 김정일에 의해 그 존재가 지워지고, 지금은 김일성의 처로 김정숙만 있는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시절 김정숙 이전에 거쳐간 여자도 있을수 있을거다., .6.25전쟁 중에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는 김일성이 매독에 걸려 606호 주사를 맞는 것을 10여 차례 보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조옥희를 심문한 김창순이 위의 압력때문에어느정도 거짓말을 시켰다고 말한적이 있다.

 

만주 빨치산 시절 비교적 오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었던 여자로 처음에는 한성희가 있었고, 두번째가 김혜순이다. 한성희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만 있을 뿐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없으나, 김혜순의 존재는 기록으로도 확인이 된다. 일본군 문서에 김혜순은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아래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으로 나온다.

 

●  일본군에 체포되어 귀순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는 김일성의 처 김혜순(22세)이 4월 초에 체포되어 귀순, 전향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던 박정숙(朴貞淑, 24세)도 같이 체포되었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22세)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조선일보 1940년 7월 5일자 석간1의 2면 기사. 그녀를 간호하던 박정숙(朴貞淑, 24세)도 같이 체포되었다.

 

 

1941년 3월에 노조에 토벌대가 작성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왼편에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 김혜순(金惠順)이 나온다. 김혜순 이름에 X 표시가 된 것은 그녀가 이미 토벌되었다는(투항했다는) 표시이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김일성 이름에는 X 표시가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월경하였다.

이명영(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이 기사에 당시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가 김혜순으로 나오는 것을 들어 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북한 김일성의 처로 김정숙과 김성애 외에는 달리 알려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학계에서는 이명영,허동*의 김일성 가짜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료,증언,자료등에 의해서 이명영의 주장이 사실과 너무 틀려서 참고 조차 안한다.

 

김혜순은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1887~1981) 소장이 지휘하는 노조에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전문가가 당시의 공작대장 나가시마 다마지로 (長島玉次郞) 조장(曹長)을 찾아가서 들은 증언에 의하면, 김혜순은 귀순 후 한 때 자신을 체포한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살며, 나가시마의 처와도 친해졌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귀순한 김혜순을 이용하여 김일성을 귀순시키려는 공작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고 하였다. 아래는 김혜순과 관련한 나가시마의 후일 증언이다.

 

『.... 한번은 金日成부대의 본거지를 점령한 일이 있었다. 山속 깊은 곳에 밀영(密營)을 만들어 놓고 거기가 본부였는데 우리가 쳐들어가기 조금 전에 그들은 눈치 채고 이미 도주하여 빈집이었다. 그때 거기서 그들의 학습용 서적 몇권과 사진 몇장을 입수했다. 후쿠베(北部)[19]의 사진첩에서 나온 이 金日成의 사진은 내가 상부(上部)에 보낸 그것이다. 체포 또는 투항한 金日成부대의 대원 들을 통해 이 안경 낀 사람이 제2방면군장(二方面軍長) 金日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金日成의 처 김혜순(金惠順)도 내가 체포했는데 아주 얌전하고 온순한 여자였으며 한동안 우리집에서 내 마누라하고 같이 있었다. 내 마누라하고 아주 친해져서 빨래도 같이 하고 일도 같이 하며 살았다. 한번은 이 金惠順을 시켜 金日成의 귀순공작을 해 봤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였는지 성사치를 못했다. 金日成은 간도(間島)의 용정(龍井)에서 중학교(中學校)을 다니다가 간도(間島)폭동 사건(一九三○년 월 五월 三○일)에 뛰어 들어 체포되었는데 유치장(留置場)에서 탈주해 소련(蘇聯)으로 도망쳤던 사람이다. 거기서 적군사관학교(赤軍士官學校)에 다녔다. 그러다가 만주(滿洲)에 파견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제二方面軍長이 되었다. 김혜순(金惠順)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의 증언이 그렇게 일치했었다.』

나가시마는 또 자기들 내외는 가끔 김혜순(金惠順)의 이야기를 한다고도 했다.

 

 김혜순을 동원한 김일성 귀순 공작도 별 효과가 없자 그 후 김혜순은 적당한 때에 풀려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혜순과 헤어지게 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며, 소련으로 월경하기 직전에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한다.

 

 

 

 

 

 

 

김일성 부대 참모장 임수산의 귀순을 보도한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5-07 일자 3면 기사.

 

4월 초 귀순한 임수산이 김일성 부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김혜순이 체포되었다.

 

 

 

 

 

 

 

노조에 토벌대 사령관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1887~1981) 소장.

 

 

 

 

 

 

 

1940년 4월 초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했던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 조장(曹長)의 1971년 2월 사진.

 

●  장해성과 문명자의 김혜순 인터뷰 기사

 

탈북자 장해성은 1980년대 중반 평양에서 김혜순을 인터뷰했던 일을 정리하여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 [생생토크 평양수다) 북, 크리스마스 어떻게 지내나?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 3층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김혜순(77세), 3번째가 박정숙(朴貞淑, 78세)이다. 박정숙은 부상당한 김혜순을 간호하다 1940년 4월 김혜순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김혜순은 자신이 붙잡히게 된것이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이었던임수산이 변절하여 일본군을 밀영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인 것 같다.

 

김혜순이 체포된 것이 1940년 4월 초인데, 참모장 임수산이 귀순한 것도 같은 시기인 것이 확인된다.

 

김혜순은 장해성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일본군에 잡혀 귀순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도망쳐 나와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게된 것처럼 주장한다. 자신의 과거 치부를 굳이 사실대로 말해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또,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2008)는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혜순과 박정숙을 인터뷰한 기사를 쓴 바 있다. 여기에는 당시 찍은 김혜순과 박정숙의 사진도 나온다.

  • 문명자(1930~2008), 《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
  • 월간 『말』 1994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  

일본 패전 후 북한이나 만주에서는 항일연군 출신자들이 권력 실세가 되어 일제에 체포되거나 투항하여 변절한 항일연군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형했다. 김혜순이 일제에 귀순하고도 처형을 모면한 것은 그녀가 김일성의 전처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그녀가 체포되는데는 김일성의 책임도 있었다.

 

●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김일성의 전처들 중에 한국에 가장 먼저 알려진 사람은 위의 김혜순인데, 그녀와 관련된 조선일보 기사와 증언을 발굴해 내었다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북한에 거주하다 소련 유학을 가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 본명 허웅배, 1928~1997)은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책에서 김일성의 처음 처는 한성희(韓聖姫)이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혜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대었다고 주장했다

 

☆ 김(金)의 최초 처(妻)는 한성희(韓聖姫)

김일성(金日成)의 최초의 처(妻)는 한성희(韓聖姫)라는 여성이었다. 빨치산부대의 부녀부장 또는 여자청년부장이었다. 이 여자는 40년 일본(日本) 토벌대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어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해방후 귀국한 뒤 곧 한성희(韓聖姫)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47년경 도여맹(道女盟) 부위원장으로 있는 한영숙(韓英淑)이라는 여자가 한성희(韓聖姫)임을 알아냈다. 한(韓)은 체포 뒤 복역중 반일(反日) 활동중지, 개명(改名), 출가의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녀는 석방 뒤 경찰의 감시가 심해 반일(反日) 투쟁을 계속할 수가 없어 농민에게 개가해 2남 2녀의 어머니로 해방을 맞았다. 개선장군 김일성(金日成)은 지도자가 됐는데 그는 빨치산 당시 그녀의 부하였던 김정숙과 결혼, 유라와 슈라라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韓)은 해방 후 로동당원이 되어 도(道) 여맹부위원장이 됐는데 남편이 천도교청우당(天道教青友黨)에 입당하는 바람에 이 가정은 정치폭풍의 와중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때 김일성(金日成)은 한(韓)을 찾았는데 김일성(金日成)은 그녀의 불행이 자신에게 관계가 있는데에 고민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한(韓)을 지구대표로 선발,파견하도록 지시하여「전부부」가 재회했고 한(韓)은 군인민위원회(郡人民委員會) 위원장으로 승격됐다. 김일성(金日成)과 한(韓)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김(金)의 처(妻)김정숙이 죽고난 뒤 김(金)이 자기의 비서였던 김성애(金聖愛)와 결혼한 때 부터였다. 이들의 결혼이 자신과 김정숙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전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계기가 된다. 1990년 10월 한소 수교 직후 방한한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내가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은 한성희란 여인으로, 그녀는 30년대 만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다 김일성과 진중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성희는 1939년 일본 토벌대에 체포돼 그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온 뒤 곧 한성희의 행방부터 수소문했고, 그녀 고향인 강원도에 빨치산 출신 부하를 보내 찾아보도록 했다. 마침내 1947년 김일성은 한영숙(韓英淑)이란 새 이름으로 강원도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성희를 찾아냈다. 한성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더 이상 항일투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강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에서 개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귀국을 알고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일본군에 체포된 김혜순의 이름은 본명이지 한성희가 둘러댄 가짜 이름이 아니다. 또 2000년 이후 중국 쪽에서 쏟아져 나온 동북항일연군 출신자 또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김혜순과 달리 한성희에 관한 당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28]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 5월 30일 자에 이름은 거명하지 않고, 김정숙 이전의 김일성의 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연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소련」으로부터 그 아내와 두 어린애를 데려내다가, 그가 북한의 괴뢰 괴수가 되었을 때는 일제시의 지사관사(知事官舍) 자리에다 호강스러운 살림을 차려놓았던 것이다. 김정숙이라는 그 부인은 사실은 김일성(金日成)의 둘째번인가 세째번인가의 아내로 첫번째 아내는 일제 때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어 하필이면 담당 취조경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해방 후 어떤 심정으로서인지 북한 독재자가 된 김일성(金日成)을 면회하려다 혼살이나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문이었다.

 

한재덕이 말하는 사람은 김혜순보다는 한성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성희가 토벌대장의 첩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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