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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19편
이름:  간담브이


등록일: 2020-12-02 23:41
조회수: 179 / 추천수: 0





시리즈게시글 아이콘[한반도 한민족 북쪽의 팩트 역사.(근현대사) ] 시리즈 시리즈란?

19편


 


 


***  해방직후 북한 상황


  


 


8.15 해방 직후 평양이 자유롭던 시기는 단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일제시대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전락해 갔다. 소련군은 도처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하루에도 수십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  북한의 자유는 소련군 진주와 함께 해방 10일만에 마감에 관련 자료들.. 


 


 


●  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마감


 


많은 평양 출신 월남민들이 평양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린 기간은 8.15 해방 당일부터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때까지 단 10일간 뿐이었다고 한다. 평남 건준이 간판을 내리면서 평양의 자유도 함께 끝났다. 해방의 기쁨도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2) 韩載德(한재덕) 1962.05.05 동아일보 2면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不幸(불행)의 씨! 蘇軍 進駐(소군 진주)…愛國心(애국심) 自治力 誇示(자치력 과시)한 貴重(귀중)한 몇날…


이리하여 「건준」이 발족한 이래 평양 (평남이라 해도 좋다.)에서는 모든 일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다. 


 


일제 군경(軍警)의 기능이 마비되었어도 오히려 치안은 그전보다 안정되고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자유를 즐기며 오로지 되찾은 조국의 민주창건에 헌신할 의욕에 불타 있었던것이다. 그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일종의 「무법낙원(無法樂園)」 시대로서 우리민족의 애국의욕과 자치능력을 과시한 귀중한 몇날이었다. 



그러나 이 감격과 행복과 자유의 날은 길지 못하였다. 실로 북한에서 진정한 해방의 날은 겨우 十日(십일)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소련군이 들어온것이다。八月 二十四·五日(팔월이십사오일)을 전후하여 소련군이 진주해오자 모든 것은 뒤집혔고 뜻하지않은 새로운 사태가 이땅에 벌어지게 되었다.


 


**  1966년에 간행된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pp.170~171]평양 천지에서는 八월 二十五·六(팔월이십오륙일) 경까지의 해방 十(십)일간이 자유의 황금시대(黃金時代)였다. 그러나 열흘 동안을 「시대」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짧고, 허무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평온한 거리에도 때때로 정체불명의 정치적 벽보가 나붙어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혼란된 정치정세를 의미하는 오보(誤報)였다.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한다」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내각 명단」 그런 종류의 오보가 흥분된 민심을 자극했다.


 


한수산 연재소설 : 우리들의 時代(시대) <161> 1985.04.17 경향신문 6면 


8월 15일에서 소련군이 진주하기까지의 10일간은 건국(建國) 꿈에 젖었던 낙원의 나날로서..... 자치(自治)의 뜻을 서른여섯해의 어둠끝에 매만져 본 감격이 채가시기도 전에 그렇게 해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고당(고堂)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의 종로에 있는 오윤선의 사랑방에서 열린 유지 간담회에서 조직되기 시작했던 <평안남도 건국 준비위원회>는 그 구성에 있어서도 우익인사가 좌익의 열배를 넘고 있었다. 서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중앙정부의 수립을 고대했던 그 나날들......평양 거리에는 포플러 가로수가 햇빛을 받으며, 무심히 잎을 떨고 있었다.


 


※  《 그러나 실제로 당시 이북의 현실은 소련군인들의 일부 횡포가 있긴 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 보고를 받고 엄중한 처벌을 했다. 그러다가 아예 범죄자들을 소련으로 돌아오게 해서 총살형까지 하는 심각하게 처벌 하면서, 곧 그런현상은 잠잠해졌다. 》


 


***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


 


소개만 하면.. 


 


 


 38 이북(三八以北)은 생지옥(生地獄)? 南쪽으로 오는 그네들 현대일보 [現代日報] 1947년 03월 14일투옥지사(投獄志士) 2천명(二千名), 백미 1두(白米一斗)엔 2천원(二千圓), 보라! 처절처절(悽絶悽絶)한 이 현상(現狀)을동경(憧憬)의 도원경(桃源境)도 듣던 말과는 딴판 만신창이(滿身瘡痍)로 귀환(歸還) : 북한(北韓)갔던 빨강이 학생(學生) 현대일보 [現代日報] 1947년 08월 05일 북한의 선전이 사실인 줄 알고 속아 월북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학생의 체험담이다. 북에서 지인이었던 이기영 (李箕永, 1895~1984)을 만났는데, 본인은 물론 이강국 (李康國, 1906~1956)도 월북을 후회한다더라고 했다.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柳在敏), 이북실정 폭로 :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04월 25일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棄權(기권)은 國民(국민)의 義務(의무)를 拋棄(포기) 1948.04.30 동아일보 3면 등이다..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류재민)은 북조선의 金日成(김일성)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씨)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문)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답)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래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북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문)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답)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문)  金九(김구)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김구)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김구)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답)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이)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이승만)·金九(김구)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김구)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김일성)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문)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답)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이상..        20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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