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 국어 통역에 브리핑, 'BBC'와 직접 인터뷰도…허진 언론담당관[2002 숨은영웅③]

허진 2002 한일월드컵 국가대표팀 언론담당관이 최근 스포츠서울과 가진 ‘2002 숨은영웅’ 시리즈 인터뷰에서 포즈를 하고 있다.
강영조기자kanjo@sportsseoul.com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는 세계열강 틈바구니에 갇혀 변방으로 취급받던 한국 축구에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심었다.
또 세계적인 수준의 축구 인프라 확보와 재능 있는 ‘2002 키즈’ 발굴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 축구 발전의 근간이 된 4강 신화는 거스 히딩크 감독과 코치진, 그리고 23명 태극전사의 땀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다.
이들의 빛나는 영광 뒤엔 숨은 조력자가 있다.
스포츠서울은 한일월드컵 20주년을 맞아 숨은 영웅을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스포츠서울 | 명동=박준범기자] 월드컵만 네 번. 바로 허진(60) 전 축구대표팀 언론 담당관이다.
그는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대(對)언론 업무를 맡았다.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위해 캐주얼 정장 차림에 백발로 등장했는데, 그가 들고 온 2002 한일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도 어느덧 색이 바랬다.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지만 허 전 담당관은 “벌써 20주년이라니, 아직도 몇 년 전 일처럼 느껴진다”고 회상했다.
◇너무나 사랑했던 축구…“일생일대 기회라고 생각”
허 전 담당관의 축구 사랑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거주할 때다.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마라도나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그는 “선수할 정도 축구 실력은 안 됐다.
대신 축구를 즐기자고 마음 먹었다.
외교부에 들어간 것도 내 눈으로 레알 마드리드(스페인)를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웃었다.
허 전 담당관은 네 번이나 월드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독일에서 근무하던 1990년에 이탈리아 대회를 찾았고, 미국에 있던 1994년에도 현장에 있었다.
또 2006년 독일 대회를 앞두고는 독일대사관으로 발령받아, 마침내 대표팀의 지원군 역할도 했다.
2002년도 마찬가지다.
허 전 담당관은 1998년 여름부터 네덜란드에서 근무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이 시기 처음 만났다.
이 인연이 축구대표팀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대언론 업무를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축구광’인 동시에 영어, 독일어, 일본어에 능통한 허 전 담당관 만한 적임자는 없었다.
그는 “사실 파견 근무는 청와대가 아니면 외교관 입장에서 보면 출세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표팀 파견 근무가) 외교관 커리어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축구를 너무 사랑했다.
일생일대 기회라고 생각했다.
언제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그것도 대표팀에서 생활할 수 있겠는가. 20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언론 담당관을 선택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동고동락’하며 바라본 히딩크, 철저한 계획·분석 통한 심리전 달인
월드컵 전까지 히딩크 감독과 언론 관계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8월 평가전에서 체코에 모두 0-5로 대패했다.
히딩크에게 ‘오대영 감독’이라는 별명이 붙던 시기. 허 전 담당관은 “1년 동안 테스트만 했다.
미리 월드컵에 나설 명단을 정해놓으면 선수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게 히딩크 감독의 생각이었다.
체코전이 끝난 뒤 공항에서 홀로 고심하던 그가 나를 불렀다.
‘한국에서는 난리 났겠지만, 변함없이 소신을 밀고 나가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히딩크 감독이 맞았다”고 돌아봤다.
허 전 담당관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히딩크 감독은 심리전의 ‘대가’. 그는 “히딩크 감독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교육할 자격증이 있다.
심리를 잘 다루는 사람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번도 특정 선수를 칭찬한 적이 없다.
인터뷰도 안정환, 홍명보 외에 주목받지 못하는 선수를 챙겼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철저한 분석과 계획이 있었다.
모든 역량이 분출되는 시점을 2002년 6월로 잡았다.
강 팀과 맞붙어 우리 문제를 알아야 한다는 게 원칙이었다”고 돌아봤다.

허진 언론 담당관(왼쪽)과 거스 히딩크 감독이 나란히 훈련장을 걸어가는 모습. (스포츠서울 DB)

허진 전 축구대표팀 언론 담당관이 인터뷰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훈련 내용 파악부터 통역, 브리핑까지…때론 직접 인터뷰도
언론 담당관 업무는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내·외신 기자들에게 대표팀의 일정을 알려주고, 훈련에 관한 브리핑을 하는 것이다.
허 전 담당관은 “매번 히딩크한테 물을 수가 없다.
훈련 중에는 말을 걸기도 어렵다.
그래서 포메이션 변화나 결장한 선수, 훈련 내용에 대해 프로페셔널하게 알아야 했다.
히딩크가 일일이 알려주지 않았다”라며 “스스로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외교관이다 보니 내가 대표팀에서도 사무실에서 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정말 선수단과 ‘동고동락’하며 코칭스태프처럼 현장에서 직접 뛰며 일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내·외신 기자들의 요청을 처리하는 일이다.
물론 통역도 허 전 담당관의 몫이었다.
히딩크는 물론 일본에서 활약했던 홍명보, ‘차붐’ 차범근의 아들로 알려진 차두리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허 전 담당관은 “나한테 몰래 다가와 선수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도 많았다”고 중간자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특히 일본 매체의 관심은 컸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허 전 담당관이 직접 인터뷰에 나서는 경우도 빈번했다.
“국내보다 일본 매체와 인터뷰를 훨씬 많이 한 것 같다”고 돌아봤다.
“독일과 4강을 앞두고는 히딩크가 인터뷰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국 공영방송 BBC와도 내가 인터뷰했다.
BBC와 인터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 뒤 “대표팀이 큰 관심을 받아 나도 언론 노출이 굉장히 많았다”고 웃었다.

허진 언론 담당관(가운데)이 취재진에게 설명하는 모습. (스포츠서울 DB)

허 전 담당관은 지난 2020년 8월부로 외교부를 떠났다.
어느덧 한국 나이로 예순을 넘어섰다.
“새벽잠이 많아져서…”라며 웃던 그는 올 11월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 도전하는 ‘벤투호’의 건투를 빌었다.
“과거의 영광은 잊어야 한다.
축구가 점점 평준화되고 있다”는 허 전 담당관은 “범접할 수 없던 팀과 대등하게 경기하지만, 얕잡아볼 팀도 없다.
‘강팀을 만나선 주눅 들지 않아야 하고, 약한 팀에 대한 존중심도 잃어선 안 된다’라는 히딩크 감독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미소 지었다.

beom2@sportsseoul.com

축구포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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