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이야기는 [여우와 포도]라는 우화를 알고 계셔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름 어둑어둑해지던 늦은 오후의 이야기. 얼굴을 따갑게 비추던 햇빛도, 햇빛에 반짝이던 푸른 나뭇잎도 잠들 준비를 하던 그런 저녁의 이야기였다.
소녀가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 여우가 너무 높아서 딸 수 없다고 생각한 포도는 정말 시었을까? "
뒤에서 귀찮은듯 낮은 울타리에 대충 걸터앉은 소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그것은 다른 여우가 먹는 걸 보면 알겠지. "
소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다시 물었다.
" 다른 여우는 언제쯤 나타날까? "
소년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 ......글쎄. "
소녀가 나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슬픈듯 안타까운듯한 눈빛을 한 그녀는 물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소녀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 다른 여우도... 포도를 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소년은 아주 덤덤하게, 무심하게, 차갑게 내뱉고 돌아서서 자기 길을 가버렸다.
" 그때야말로 포도가 정말 시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
작은 방안. 심플한 디자인과 어두운 색상의 배열이 그다지 소녀다운 방은 아니다. 방 한켠에 앉아 휴대폰을 한손에 쥔 소녀가 품에 안은 베개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무런 수신도 없는 휴대폰은 조금 전 소녀가 폴더를 열었다 닫음으로 인해 파란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소녀는 조용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여우는 말이야...
과연 그 높아서 따지 못한 포도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을까?
물론, 나중 나중에 더 맛있는 열매를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못 찾았을 수도 있잖아.
혹은 찾았다고 해도 그래도 역시 먹지못한 포도에 대한 미련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을까...? '
" 이 정도면 되겠어? "
" 응. 그정도면 충분해요. "
두 팔에 액자를 들고 벽에 가져다 맞추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액자를 벽에 기대어 세운 후 못과 망치를 들고 허리를 펴는 그를 바라보며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조심해요. "
그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넉넉한 미소를 지어주는 남자. 여자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따라 흘렀다. 환한 방 안에 밝은 웃음이 넘쳐 흘렀다. 더이상 그녀의 손에 수신없는 휴대폰은 들려있지 않았다.
집안 정리를 마친 남자는 쇼파에 기대 앉아 쉬고 있었고, 여자는 이제 막 이사온 집에 짐을 풀기 위해 박스를 열었다. 책을 한번에 여러권 들어 책장쪽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 앞으로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책을 책장에 끼워넣은 뒤 돌아선 그녀가 좀전의 그 종이를 집어올렸다. 지금보다 짧은 머리의 그녀가, 지금 함께 있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밝게 웃고있는 사진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 이게... 아직 있었네. "
그녀가 웃으면서 사진을 들고 거실로 갔다. 남자는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다가 그녀의 손에서 시선이 멈췄다.
" 자기야, 이거봐요. "
" 아아 예전 그 사람이야? 아직 가지고 있었어? "
태연하게 묻는 목소리에 그녀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즐거운듯.
" 그러게요. 책 정리하는데 나오더라고요. "
사진을 보던 남자가 여자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이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양 볼을 살짝 꼬집었다.
" 그래서 나한테 자랑하려고 들고 나오셨구만~ 우리 마눌님이~! "
"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
그녀가 웃으며 되묻자 그가 그녀의 손에서 사진을 뺏어들어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 이렇게보니 역시 내가 훨씬 낫구만~. "
" 그래요? "
" 이거 봐. 눈도 내가 훨씬 크고, 내가 더 잘생긴 것 같은데? "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윙크를 하자 여자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때 그녀의 전부였던 그 시간을 담은 사진은 평범한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어쩌면 그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미련을 가지고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
그래.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젠 내 옆에 그이가 있기 때문에 그때의 내 마음,
그 마음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달까..
역시 그것은 손에 넣지 못한 포도에 대한 미련일까..
아니면, 포도를 정말 정말 좋아했던 걸까...?
모르겠어.
모르겠어.. 그래.
지금도 생각하는 거지만, 손에 닿지 않는 열매 대신
주위의 손에 닿는 열매를 먹었던 것 같기도 해.
맛있던 맛있지 않던.
나는 그렇게 살았던 건가....
그래, 너는 이런 나를 비난했었던 거였구나.
그래.. 그래...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 미련을 떨칠 수 있었어.
왜냐하면 다른 포도 중에서 정말 달고 맛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역시 이 것은 그 신포도의 덕분이야.
고맙다. 신포도..
온 마음을 다 바쳤으나 얻지 못했던 그 마음..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
이 것은 2009년에 쓴 글인데 자작글 포럼을 지금 처음봐서 한번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조금 유치하지만 즐겁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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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글이네요
포도라는 본질은 변함없지만 언제 따먹느냐에 따라서
달콤하기도 시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랑과 인생은 타이밍
그 말이 정답이네요. 인생은 타이밍!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