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무살무렵...
대학교 다니면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이 자리에서 그중 유난히 재미있는 친구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K.
그의 모습을 간단히 말하자면, 키는 160cm에 얼굴은 마치
철조망에 매달려 소리지르는 일본 원숭이와 같고, 머리는
어울리지 않게 곱슬거려 없는 돈 친척들에게 추렴해서 매직
스트레이트니 뭐니 해놓은 데다가 당시에는 싸가지 없는
놈이란 소리를 들어도 가당찮을 오색찬란한 물까지 들여
주위의 비난을 당하는 용한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늘 그의 별명에는 머리끄댕이에 관계된 단어들이
자주 사용됐다. 새집...대걸레..등등..-_-;;
그러나, 이 어떤 일련의 사건뒤에 그의 별명은 9년 내내
줄곧 하나로 통일되었다. 아...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S선배 : 자...꽈를 위하여..~ 에또.... 건배!
일동 : 건배!
음향효과 : 쨍! 벌컥벌컥!
대학교를 다니다보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술을 못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끼어있을 때
인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뭐 선배가 봐줄 요량으로 그렇게
술을 마시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알콜 분해 능력
이라곤 사이다 섞은 막걸리 한잔분량 밖에 안 되는 H양이
있었다. 잠시 그녀의 겉모습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머리
모양이야 말할 것도 없이 요즘 티비에서 참한 탤런트가
수도 없이 했던 청순한 그 머리, 어깨까지 기른 스트레이트
에..(침 질질~) 오~! 딱 그건데, 몸매는? 비너스. 얼굴은?
캬, 백옥 같은 피부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 앵두 같은 입술,
그야말로 앙증맞은 사과 같다고 하자. 얼마나 귀엽고 아름
다운가?(또 침 질질~) 문제는 그녀의 화장이 화장의 수준을
넘어서 변장수준인 것이라고 하면 알아듣겠지. 아직도 술
자리에서 친구들과 만나면 가끔씩, 우리들은 그녀가 사용하
는 화장품과 체형 보정기구의 총 가격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
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 가격은 우리 아버지의 한달 수입을
넘어서 웬만한 식당 하나 차릴 돈이 나오는가 하면, 급기야
는 이종범 연봉이 나오고, 종래에는 빌게이츠나 마이클 잭슨
이 나온다고 하장....
흐음~ 어쩌다 말이 길어졌는데, 그런 H양을 좋아할 녀석은
대단히 순진한 녀석이 아니겠는가. 아, 사람을 얼굴로 판단
하지 말라구? 그런 위선은 그만 둬라. 성자가 아닌 이상 남
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다가가게 되어있다. 가끔씩 돈을
보고 다가가는 놈도 있다지만, 첫인상은 얼굴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어쨌건, 그때, 폭탄주 원샷 이벤트에 참석하게 되어 - 당연히
강제다. 술 좋아하는 선배 만나면 이래저래 고생인것 같다.
(헛..뜨끔~) - 씨부렁거리던 나는 K군이 대단히 순진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S선배 : 자, 마셔마셔! 원샷! 우승하면 사랑해 주갔으...
일동, 소주+맥주의 엽기 폭탄주를 마신다.
음향 효과 : 벌컥벌컥!
P군 : 케헥, 더는 못 마시겠어요.
S선배 : 어허, 벌써 탈락이야? 아니, H양, 왜 안 마시는 거지?
H양 : 저, 술을 잘 못해서요. 좀 빠지면 안될까요?
S선배 : 아, 이거 안 되는데, 모처럼의 선배들 없는돈 추렴해서
만든 자린데. (솔직해져라..선배..-_-;;) 자, 누구 H양을
인류의 적, 술로부터 구해줄 흑기사 없나?
일동, 술을 마시다 말고 잔을 내린다. 그들의 입가에는 마시다
만 술과 함께 시간을 끌 찬스를 잡았다는 행복한 미소가 배어
있다.
K군 :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며) 있습니다!
일동 : (박수) 와! 와! K군! K군!
S선배 : 좋았어! 자, 힘내라! K군!
H양 : (술 마시는 것을 피하게 된 것을 기뻐하긴 하나 흑기사가
K군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해하는 표정. 그러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요,
K선배...
K군 : 뭐, 이 정도쯤이야. (자신의 대사에 만족한 듯 미소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입으로 가져가서 들이붓듯 마신다.)
음향효과 : 벌컥벌컥!
일동: (K군의 술잔에서 술이 줄어들 때마다)오! 오! 오! 오!
K군 : (술잔을 비우고 그것을 들어 머리 위로 가져가 뒤집어
흔들었다가 조금 남은 술이 머리에 떨어지자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미지 관리를 위해 머리가 젖은 것이 유쾌하다는
듯이 가식적으로 웃는다.) 홧홧홧!
일동 : (가열찬 박수와 함께) 와! 와! K군! K군! K군!
S선배 : 오, 놀랐어, K군. 내가 본 것 중 가장 멋진 흑기사야.
일동 : (S선배의 마지막 말에 맞춰) 하하하...
K군 : (S선배의 말을 곧이곧대로 생각한 듯, 쑥스러워하며)
음홧홧홧!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날 일이 있은 후에 그의 별명은 흑기사
가 되었다. 물론 나와 친구들은 새로운 얘깃거리를 얻었다는데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속쓰림에 고통스러워했고, K군을 재미있
게 생각하면서도 캠퍼스 후문 잔디밭에 오바이트를 하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넌더리를 내야했다. 잔디에서 유행성 출혈열을
유발하는 등줄무늬 쥐가 출몰한다는 유비통신이 있던데.....
놈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K군이 베푼 것이
었다. 우리는 짓궂은 선배들에 의해 잔디밭에 널부러지는
불쌍한 후배들에게 축복을 하며 K군을 택시에 태워 자취방으
로 보내고, 어디 조용한 곳에서 해장국이나 먹으며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몸을 날려 들어간 해장
국집에서 S선배를 만난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 쳤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친구들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K군이 H양에게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K군이
그 정도로 대담한 성격이었는지는 2년이 지나도록 몰랐다.
들은 바로는 그때 상황은 이랬다고 한다.
K군 : 저기, H양, 에, 그, 그러니까..
H양 : 예?
K군 : H양! 에..그러니까...내가...당신을....에..또.....조..
좋아해도 될까낭.
H양 : (맑은 하늘에 이게 왠 날벼락이냐는 표정, 그러나 드라
마에서 여러번 본 그 모습 그대로 표정을 바꾼다.) 미안해요
선배, 나 다른사람 있어요....
K군 : (H양의 고백을 받은 직후의 표정.) 그, 그렇. 그, 그럼
안녕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린다.)
뭐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하기도 한다.
K군 : H양, 나랑 사귀어줘! 안그럼 (캇타칼을 꺼낸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어.
H양 : 네?!
K군 : 그..그러니까...잘 생각해서 나랑 만나줘!..^^;
H양 : (역시..맑은 하늘에 이게 왠 날벼락이냐는 표정, 그러나
역시..드라마에서 여러번 본 그 모습 그대로 표정을 바꾼다.)
미안해요 선배, 여기서 그걸로 손목을 자르든 쥐포를 썰든
저 별로 관심 없걸랑요...
K군 : (속으로 헉! 뚜시궁~) 그, 그렇. 그, 그럼 안녕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린다.)
뭐 이야기가 어찌됐든간 그 이후 K군은 수업도 안 들어오고,
술과 눈물에 쩔어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우수한 내 레이다에
잡혔다. 그리하야!
나는 그를 위로하려고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널려있는 소주병들을 안고 자고 있었다. 지독한 술담배
냄새가 풍겼다. 나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고 창문을 연 뒤
그를 흔들었다.
"K군, K군!"
K군은 놀랍게도 자신을 곤한 잠에서 깨워 숙취의 지독한
고통에 빠뜨리는 내게 욕 한마디 하지 않고(평소 그의 행동에
비추어 보면 내겐 놀라움 그 자체였다...-_-;;) 자리에서 일어
났다. 물론 그의 표정은 백 마디의 욕 이상이었다. 그는 가슴
을 쥐어뜯으며 머리를 흔들다, 내 모습을 간신히 분간하고는
소리쳤다.
"워터!"
나는 군소리 없이 퀴퀴한 곰팡내와 술 냄새가 진동하는 방구
석에 처박혀 간신히 돌아가는 싸구려 냉장고에서 물을 가져
다 주었다. 나도 예전에 친구놈들에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으
니까... 그는 내가 가져다 준 PT병 주둥아리와 격렬한 딮 키스
를 나눈 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말했다.
"E군? 여긴 어떻게?"
나는 양손으로 그의 볼을 이리저리 두드리며 말했다.
"정신차려, K군."
그는 내 손을 치우며 말했다.
"하지마, 골에 지진나.."
"그러길래 작작 좀 퍼마시지, 쉐끼 꼭 하는 짓은..."
"알았어."
"지랄 작작 하고 학교 좀 나와, 니 마음은 알겠다만, 너 없어서
술값...어 ..그게 아니라..비싼 등록금좀 생각해봐 임마. 그리
고, 그만 잊어 임마."
K군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잊지 못하겠어."
"잊어, 잊지 못하겠거든 축복해. 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 행
복하게 살기를."
그는 말이 없었다.
"그 정도로 성인군자가 못되면 저주해, 얼마나 멋진 남자 만나
어떻게 사나 평생 지켜보고 비웃어주겠다고. 아니면 복수해,
그녀보다 멋진 여자 만나 평생 잘살면 그게 복수야."
더 이상 해줄 말은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나가며 말했다.
"니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알아서 해라. 그리고 내일 안나오면
자취방 불 지를 줄 알어."
그 말을 끝으로 머리를 감싸쥔 K군을 뒤로 한 채 그의 자취방
에서 나왔다.
다음날, K군은 수업에 들어왔다. 모처럼만에 학교에 소풍가는
양 나온 나와 강의가 끝난 뒤 강의실 뒷문에서 정면으로 마주
쳤던 것이었다..-_-;;
그는 언제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뭔가 변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변화였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던가. 그는 성숙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변화는
얼마 후 노래자랑대회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물론 S선배의
술타령에 놀아난 선배들이 잡아준 싸구려노래방에서 개최된
대회였다. 그때 K군은 H양옆에 앉았던 N양을 대신해 노래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노래를 못했고, 다음날 목이 쉬어버렸다.
그러나, 나와 친구들은 환호했다. 이 녀석이 드디어 요즘
사람이 됐구나! 멋진 복수다! 캬캬캬..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후의 술자리에서는 H양의 흑기사가
되었다. 미팅에서는 처음 보는 여자의 흑기사가 되었다.
동아리 술자리에서도, 축제 때 주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항상 흑기사 노릇을 했다. 얼굴이나 잘생겼으면 뭐라고
안 하지...에휴..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야, 왜 맨날 흑기사를 하는데? 돌아오는 것도 없는 멍청한
짓을 왜 맨날 하는데? 남의 비웃음이나 사는 그런 짓을 왜
하는데?"
K군은 내게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보답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 순진했다. 메마르고 거친 사막 같은 세상에서 살기
에 그는 너무나 천진했다. 착한 일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해주고, 하느님이 천국가게 해준다는 말이 추억거리가 되버린,
고색 창연한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말이 되어 버린 지금, 그는
나올 때를 잘못 알고 나온 엄숙한 무대 위의 어릿광대가 되어
있었다.
앞서 소개를 시작할 때 말한 '유난히 재미있는 친구'라는 말을
취소한다.
K군의 별명은 "흑기사"다.
그리고 벌써 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는 페어레이디
가 없다.
End & continu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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