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대부분의 측면에서는 비교적 우유부단한 성격이랄 수 있겠지만, 단 한 가지 그러니까 '이성' 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어려서부터 확고한 신념이랄까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이라고 표현하니 좀 웃기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말해질 수 있을 정도라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이건 흔히 말하는 이상형이라는 것인데 뭐 보통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 그런 걸 가지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유별나달까, 이건 마치 어떤 이데아를 꿈꾸는 것처럼 나는 어려서부터 굉장히 한정된 유형의 여자에게만 관심과 사랑을 느끼곤 했었다.
일단은 키가 좀 크고 말이다, 그리고 피부가 굉장히 하얗고, 너무 하얘서 핏줄이 드러날 만큼 그리고 좀 말라야 한다. 날씬하다는 얘기인데 마르면 마를수록 좋다. 한겨울의 메마른 나뭇가지와도 같이 가느다란 여자의 팔목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동요하게 된다. 얼굴은, 약간 뼈마디가 도드라져 보이는 좋은데 광대뼈가 좀 나와 있어야 느낌이 산다. 눈은 아주 크고 그 눈빛에서 순진함과 요염함이 공존하고 있는 듯 하는 그런 게 있어야 한다. 표정도 중요한데, 무표정할수록 좋다. 인간다운 희노애락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절대적인 무표정이라면 그것만큼 신비로울 수 있는 것도 세상에 없다. 머리칼은 길어야 하며 약간 파마끼가 있는 게 좋다. 아 참, 앞머리가 조금 흘러내린 측면모습이 무척 어울려야만 한다. 그리고 웃는 게 예뻐야 하는데 웃을 때는 소리내지 않고 입만 살짝, 그 순간 얼굴에서 하얀 빛이 나와 주면 더욱 좋다. 후광이라고 하나, 그런 게 있어야 한다.
하얀 옷이 잘 어울려야 한다. 하얀 원피스 같은 걸 입고 다니는 여자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말이 없어야 한다. 침묵을 지킬 줄 아는 과묵한 여자여야만 한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키 크고 마르고 머리길고 하얗고 그런 여자가 앞머리가 흘러내린 측면모습만을 보여주며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가(굉장히 오래 걸었음에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그저 무표정했던 그녀)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살짝~웃어주는, 그러면 후광이 확 터지는 그런 광경은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무척 행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이런 얘기를 물론 지금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부분적인 것만이라도 털어놓으면 주변의 사람들은, 친구들이나 뭐 그런 얘들은 피식 한 번 웃고는 '야, 그런 게 어디 있냐. 그런 거 환상 아냐, 녀석도 유치하기는' 뭐 이런 식의 직접적인 언사를 내뱉거나 아니면 굳이 입으로 꺼내지는 않아도 그 표정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걸 알 수가 있는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던 것이다. 그럴 때면 나도 어쩔 수가 없이 '아, 좀 그렇지' 라고 부끄러운 듯 말하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으며, 그건 환상이 아니라고 그런 여자는 분명히 있다고 아무도 들을 리가 없는 나 혼자만의 독백 안에서 흥분을 해서 외쳐대곤 했었다.
분명, 그러한 나의 이상형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는 못할지라도 그에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여자들은 꽤 많았다. 내 말을 비웃었던 사람들이 의외라고 여길 정도로 말이다. 2차 성징이 발달했던 유년기 이후로부터의 나는, 줄곧 그러한 여자들을 찾아 헤매어 다니고는 했는데 아마도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나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여자들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느 장소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간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서 최고의 남자다운 용기와 기백을 가지고서 거침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였던 것이다. '나의 그녀' 가 버스에서 교복을 입고 서 있다면 그녀를 다짜고짜 내리게 해서 햄버거와 콜라를 하나씩 사주면서 진정 나의 그녀가 맞는 것인지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혹시 하얀 원피스 좋아해?" 조심스럽게 물어보곤 했었고 그런 내 물음에 멍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를 않는다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수가 적은가봐 야호-' 를 외쳤었다. '나의 그녀'가 교실의 칠판 앞에서 우리들에게 교과서를 가르치고 있다면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수업이 있기 전 쉬는 시간에 열심히 칠판을 깨끗하게 닦아놓곤 했으며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 책을 들고 교무실로 찾아가서는 제발 그녀가 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기를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다가 한 순간 살짝 웃어주기를, 후광이 터지기를 염원하였었다.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하는 것도 같지만, 그 정도로 나는 열심이었다.
유년기의 나는 '나의 그녀' 를 찾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노력을 들이곤 했었는데 마치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사랑의 여정은 지고지순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결과적인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조금 비참한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찾아낸 수많은 '나의 그녀'후보들은 결과적으로는 나의 그녀가 될 수 없는 불합격 요소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도 했고 설령 그런 게 없었다고 한들 그녀 쪽에서 나를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거나 무시를 하곤 했었기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버릴 나는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에게 있어 '이상형' 이라는 것은, '나의 그녀' 라는 그것은 너무도 확고하고 명확해서 인생에 대한 하나의 신념으로까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건 결코 쉽게 내던져버릴 수가 없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대학에 올라가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의 신념을 나의 인생에 관철시키기 시작했다. 잠을 자지 않고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나의 그녀' 를 찾아 헤매었고 (신입생OT에서건, 타과수업을 듣는 강의실에서건, 알바하는 식당에서 손님들을 받으면서도, 피서지에서 수영복차림의 여자를 구경하면서도, 심지어는 교생실습을 나가서도 ) 덕분에 상당히 완벽한 '나의 그녀' 를 발견할 수가 있었으며 일단 발견한 이상에는 노인과 바다에서 철갑상어를 낚은 그 때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서는 맹렬하게 구애작업을 벌였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는 옛 선인의 말씀은 어느 정도 진실하다고 본다. 내가 그닥 봐줄 구석이 있는 남자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사랑을 향한 끊이지않는 노력과 성실은 결국에 '나의 그녀' 에게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고 드디어, 드디어 나는 평생을 꿈꾸어왔던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행복했다. 남자는 자신이 원하던 걸 쟁취한 그 순간에 최상의 행복을 느끼는 법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어떻게 되었냐면 어처구니가 없게도 내가 찾아낸 '나의 그녀' 와의 연애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첫 번째가 실패한 후에도 나는 두 번의 도전을 더 했었다. 왜냐하면 첫 번째가 혹은 두 번째가 내가 찾던 나의 그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세 번째까지 실패하고 말았을 때에는 그때는 젠장) 모두가 완벽한 나의 이상형들이었지만 도대체 어째서였을까, 나는 완벽한 그녀들과 사귀기 시작해서 채 반년을 넘긴 적이 없었다. 처음엔 좋다, 너무 좋다. 드디어 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낸 것이고 이제부터 나의 인생은 꽃 필거야, 그런 달콤한 꿈에 젖어서 하루하루가 꿀 같았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나는 완벽한 그녀들에게서 결코 흡족하지 못한 어떤 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떤 점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들이 내가 원하는 조건에 어긋났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들은 정말 완벽했다. 키가 컸고 말랐고 피부가 하얗고 머리가 길었으며 말이 없었고(한 여자는 정말 지독하게 말이 없어서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있으면 고즈넉한 산속의 암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웃을 때 후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새하얀 이에서 눈부심이 느껴졌었다. 물론 하얀 원피스도 어울렸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고 행복하지가 않았었다. 뭐랄까, 뭔가 진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그녀들에게서가 아니라 그녀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 자체에서 진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완벽한 그녀들에게서 석연치않은 뭔가를 느꼈던 것이며, 일단 그렇게 되어 버리고나면 나의 태도는 눈에 띌 정도로 불량스러워지기 십상이어서 그런 내 꼴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의 그녀' 들은 결국 나의 궁둥이를 걷어차 버렸다.
왜 그랬을까, 내가 원하던 걸 가지게 되었는데 왜 행복해질 수 없었던 것일까, 지금도 심각한 의문에 사로잡히지만 확실한 해답을 규명해낼 수는 없다. 단지 추측만을 해 보건데, 어쩌면 나의 이상형이라는 게 겉모습이 다는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까 내가 찾아 헤매는 '나의 그녀' 에 대해서 나는 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걸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걸 내가 미처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무튼 그래서 내가 찾는 그녀는 처음 겉모습만 봐서는 미처 다 알 수가 없고 일단 함께 시간을 보내어봐야 느낄 수가 있는 그런 것인가보다라고 약간의 합리화같은 논리로서 내 지난 실패의 기억을 위로할 수밖에. 세 번째의 '이상형' 과 헤어진 이후로 나는, 더 이상은 '나의 그녀' 를 찾아 헤매지 않게 되었다.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나도 '그런 것 따위 그냥 어린 시절의 유치한 환상에 지나지 않다'며 '나도 여자라는 것에 대해 직시를 하게 된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세상을 현실적으로 바라보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어른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이상형에 대해서 나는 점점 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그건 잊혀져 갔다. 잊혀져서 잊혀져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고나고 나면 어, 내가 그랬던가 하고 스스로도 의아해하게 되는 날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또 다시 '나의 그녀'를 떠올리고 고민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냥 잊혀질 줄로만 알았는데 뭐야,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일까. 아니다. 그런게 아니라 오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가 이제는 벌써 이십대 후반인데 그걸 생각한다면 이런 스스로가 너무나도 주책스럽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오늘 '나의 그녀'를 보고 만 것이다. 진짜 나의 그녀를.
오늘 어머니를 뵙기 위해서 집에 갔었다. 한약을 달여 놓았다며 가져가라고 성화이시길래 어쩔 수 없이 아침부터 수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타야만 했었다. 제법 일찍 나선지라 열한시즘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미처 양말을 벗어내기도 전에 어머니는 점심상부터 차려서 내어놓으셨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우리 어머니도 나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먹이시는 걸 좋아하신다. 어머니랑 나 둘이서 먹을 점심상인데도 찌개며 생선이며 반찬이 많았다.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간에 별다른 말이 없는지라 항상 그렇듯 티브이를 켜서 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리모컨으로 여기저기를 돌려보다가 외국영화가 나오고 있는 채널에서 손을 멈추셨다. 어머니가 고르신 채널에 감히 거스를수는 없는 일이기에 나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리면서 눈으로는 그것을 보았다. 영화는 꽤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는데 80년대 하이틴 취향의 뭐 하늘색청바지입은 파마머리한 미국젊은이들이 나오는 그런 영화였다. 제목이 유치찬란-<천사와 사랑을>-했는데 내용도 그에 뒤지지 않을만큼 유치찬란했다. 제목 그대로였다. 천사와 사랑을 하는 내용인데, 우주를 떠돌던 어떤 천사가 인공위성에 부딪혀서 날개를 다치고 그래서 어떤 평범한 청년이 살고 있는 집의 수영장으로 추락을 한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천사이기 때문에 다치지는 않고 무사히 깨어나서는 자신이 떨어진 집의 평범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너무나도 아리따운 천사의 모습에 정신을 못차리고 황홀해하는 평범한 청년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져 나왔다. 나는 그만 숟가락을 떨어뜨려버렸다.
"어머니, 영화가 좀 유치하네요."
어머니도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런데 그 미소가 좀 흐뭇해하는 것 같은.
"유치해?"
"에, 어머니는 재미있으세요?"
나이가 들면 취향이 까다롭지 않아지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계속 웃으셨다.
"너 이 영화 기억안나?"
"네?"
"너 어렸을 때 이 영화 나랑 같이 봤었어. 조금도 기억안나?"
봤다고? 아니, 나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제가요? 언제요?"
"너 어렸을 때, 국민학교 때였었나? 그때도 테레비에서 이걸 해줬었는데 니가 얼마나 재밌게 봤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을 못하네."
그러고는 또 웃으신다.
"니가 이 영화보고는 나보고 여기에 나오는 그 감자가 먹고 싶다고 얼마나 떼를 썼는데."
"감자요?"
"아, 왜 그 있잖아,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감자 튀긴 거."
후렌치 후라이, 물론 내가 잘 먹는 음식이긴 하지만 그게 이 영화 때문이라고? 나는 어머니께서 뭘 말씀하시는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뭐 원래부터 얘기가 잘 통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서 티브이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어도 특별한 기억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라면 20년정도가 흘렀을텐데, 재밌게 봤다면서 왜 하나도 안 떠오르는건지 그런데, 다른건 몰라도 이 영화에 나오는 천사는 정말로 미인이지 않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천사역을 맡은 그녀는 내가 잘 모르는 서양 여배우였는데 누구인지 몰라도 정말 캐스팅 하나는 퍼펙트하달까, 진정으로 천사같은 여자였던 것이다. 피부가 아주 하얀 여자였다. 곱슬끼가 있는 긴 금발이 아름다웠고 웃을 때 드러나는 광대뼈가 매력적이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감탄을 하게 되는 절대적인 미인이랄 수 있었다. 살짝 미소를 지을때는 단지 특수효과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후광이 터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리고 잠깐 나는 멈칫했다. 뭐지 이건? 지난 시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형이랑 지나칠정도로 흡사하지 않은가. 키크고 마르고 투명할정도로 흰 피부에 광대뼈가 있으며 더군다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사이기 때문에 인간의 말을 모르므로. 뿐만인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당연히 천사이니까. 티브이속의 그녀는 평범한 청년과 키스를 하려는 중이었다. 가볍게 흘러내린 앞머리, 옆모습의 얼굴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더 이상 밥먹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멍해져서 티브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우연일까? 그냥 우연일까?
영화 <천사와 사랑을> 에서의 엠마뉴엘 베아르
"왜 그러니, 밥 안먹어?"
어머니가 물으셨다. 나는 젓가락을 집어서 반찬을 고르는 척 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티비 속의 천사는 평범한 청년이 사들고 온 햄버거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생전 처음보는 햄버거를 보고서 어여쁜 천사는 겁을 집어먹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햄버거를 거부하고 잠시 청년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천사는 햄버거가 아닌 그 옆의 후렌치 후라이에 관심을 가져본다. 유심히 그걸 관찰해보다가 덥썩 한입을 베어물어본다. 맛있다, 후렌치 후라이가 맛있다는 걸 천사는 깨닫는다. 그리고 곧이어, 허겁지겁 후렌치 후라이를 무진장 급하게 먹어대기 시작한다. 천사는 후렌치 후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여쁜 천사는 너무나도 게걸스럽게 후렌치 후라이를 먹어서 결국 종이까지 씹어버린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다. 천사는 뭘 해도 너무 아름답다. 천사가 게걸스럽게 후렌치 후라이를 먹다가 종이를 씹어버리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나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나의 뇌리로는 지난날의 인생, 순간순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장면 장면들에서 지난날의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열심히 '나의 그녀'를 찾아내어서는 아니나 다를까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패스트푸드점에 앉혀놓고서는 그녀가 후렌치 후라이를 먹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다. 머리통이 무거워서 차창에 기대어 있다. 아마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무거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런 일이. 내 젊은 시절의 거의 대부분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열정의 정체가 고작 어렸을 때 본 영화 한편으로 방향지워진 것이었다니. 나는 기분이 뭐랄까, 굉장히 허탈했다. 나는 뭐야, 그 한편의 영화에 세뇌라도 당했었다는 말인가, 그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유치찬란한 B급 영화에는 어느 초딩소년의 미래에 최면을 걸어줄 음파라도 흘러나왔다는 말인가, 맙소사 하지만 적어도 금발의 서양여자를 찾아헤매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은 게 어딘가, 날개달린 여자를 찾아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은 게 어딘가, 나는 단지 천사를 찾아서, 천사를 찾아서 나는 살아왔던 거구나. 내가 찾으려 노력했던 것은 천사였구나.
기가 차서 웃기지도 않은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런 사소한 계기로 생겨버린 환상에 그토록이나 애를 쓰고 목을 매어 왔었다니, 그래도 지금까지 계속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까지도 내가 그런 환상을 벗어나오지 못했다면 오늘 나는 정말이지 어떡할뻔 했는가. 사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영화속의 여자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여자친구가 있다. 그녀는 지난날에 내가 가졌었던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여자이다.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편이고 건강하고 말도 많고 활달하고 아주 귀엽다. 그래, 그녀는 너무나도 귀여운 여자이다. 그 귀여움에 반해서 그녀를 사랑하고 말았었다. 처음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조차도 무척 놀랐었다. 내가 '나의 그녀'가 아닌 그것과는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다니, 나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경험이었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세번째의 '나의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이제 정말 연애는 진저리난다며 자포자기한 상태로 지내오던 그러다가 어느날, 나는 또다른 그녀를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내가 쫓아다녀왔던 여자들과는 뭔가가 달랐지만, 아니 꽤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서 예전에 느꼈던 것과는 다른 조금 낯선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이상형과는 너무 이질적인 여자였는데도 그녀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나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였다.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애를 해보는 소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만 있으면 뭘 하든간에 굉장히 즐거웠고 마치 아이와도 같은 기분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자주 서로의 하얀 이를 드러내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웃을 수가 있었다. 그래,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에는 진실함이 느껴졌었다. 그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서 충분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상형이 어떻고 어떻든간에, 나의 그녀고 뭐고 간에 오직 내가 행복을 느끼니까 그것으로서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대단한 결정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수 있었다. 너를 사랑한다고. 지금도 나는 내가 한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선명한 진실이라는 자신할 수가 있다. 진실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나를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하면서도 나의 감정에는 문득 어떤 서글픔같은 것이 끼어들어버린다. 물론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뭐랄까, 정말 그렇다면 이제 나는 천사를 찾는 일을 포기해 버린 것일까, 아무리 고작 영화 한편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건 나의 꿈이었던 게 아닐까, 나는 자신의 뜨거운 꿈을 포기해버리고서 냉냉한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그런 평범한 청년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니까 나는 버스 창밖으로 비추어지는 고속도로의 풍경마저도 몹시 우울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회의가 스며든 것을 느꼈다.
버스는 계속해서 달렸다. 창밖의 다른 차들도 모두들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렇게 열심히 달려서 어디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창밖의 세상은 몹시 흐려져 있었다. 아스팔트뿐만이 아니라 하늘도 회색이었다. 이제는 빗방울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기댄 유리로는 투명한 구슬들이 맺혀서 투명한 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그것들에 얼굴을 문대어 보았다. 더 이상은, 고민해보아도 귀찮은 일 같았다. 천사는 무슨, 천사를 찾아내어서 천사와 함께 살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저 그런식으로 대충 생각을 해 버리고 멍하니 유리에 흘러내리는 빗방울만 보고 있기로 했다. 잠시 후에는 슬그머니 졸음이 밀려들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의식의 끄트머리에서는 자동차 바퀴가 도로의 물살을 헤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어느덧 마로니에 공원 앞이라는 안내방송에 잠을 깨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짐을 챙겨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몸을 추스리며 벗어두었던 잠바를 껴 입었다. 밖에는 이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제법 굵어진 빗방울에 인도는 흠뻑 젖어 있었다. 나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는 수 없지, 택시라도 잡아타고 가야지.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은 줄을 서서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펴는 사람도 있었고 아니면 가방같은 걸로 머리를 가리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후자쪽에 속해야만 했다. 버스계단을 내려와서 잠바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뜀박질을 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나의 머리 위에서 촤악하고 펼쳐지는 빨간색 우산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였다. 나의 그녀.
"어, 왠일이야?"
우산을 들고 있는 그녀는 멋적은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중나왔지, 바보야- 비오잖아."
"와, 착하네."
"그럼 후후-내가 좀 착하지."
짐짓 잘난 척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나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나는 그녀의 우산을 받아들어서 우리 둘 사이에 들었다. 바로 앞에서 가방이나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괜히 기분이 흐뭇해지는 것 같았다.
"밥 먹었어?"
"아니, 오빠는 먹고 왔지?"
"아니."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왠지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서 뭔가를 맛있게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뭘 먹으러갈지를 고민해보았다. 비도 오고 하니까 따뜻한 해장국이나,
"그러면은 오빠-"
그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응?"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갈까?"
"햄버거?"
"응, 오빠 좋아하잖아"
"어, 그래, 그러자"
나는 얼떨결에 그러자고 대답해버렸다. 햄버거, 햄버거, 햄버거. 우리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을 향해서 걸어갔다. 걸으면서 나는 또 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본 영화 <천사와 사랑을> 그것 말이다. 그 영화에서 햄버거와 후렌치 후라이를 즐겁게 나누어먹은 천사와 평범한 청년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냐면. 그들은 어쩌고 저쩌고 굉장히 많은 사건을 겪다가 결국에는 어쩌다가 평범한 청년이 죽어버린다. 정말 어쩌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조금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죽은 청년을 살리기 위해서 천사는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천사의 날개를 버리는 조건으로 죽은 청년을 살려내 달라고 말이다. 어째 좀 타산이 안맞는 거래같지만 하지만 조건없는 사랑이 미덕이신 하느님께서는 결국 거래에 응하신다. 그래서 청년은 되살아난다. 날개를 잃은 천사는 어떻게 되었냐면 물론 인간이 되었으므로 되살아난 청년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런 좀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영화는 거기까지이지만 인간이 된 천사와 되살아난 청년은 이후에 또 어떻게 살아갔을까, 나는 거기까지도 궁금점이 미쳤다. 뭐 보통의 평범한 연인사이가 되었겠지, 자신이 과거에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채 영화도 보러가고 같이 술도 마시고 섹스도 하고 이런. 그리고 그리고 어쩌면, 천사는 이제 인간이 되었으므로 사람의 말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다를 능숙하게 떠는 여자가 되어서 청년과 이것저것 많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빗속에서 나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며 자신의 친구 얘기를 열심히 들려주고 있는 내곁의 그녀처럼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 본다. 그녀는 이제 친구얘기를 멈추고는 횡단보도 건너편의 신호등을 보고 있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자 그녀는 '파란불이다' 중얼거리고는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녀를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래서, 우산을 들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나의 소중한 천사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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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꼼꼼히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