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따스한 어느날.
바람이 불때마다 코끝에 풀 향기가 났다.
하늘에는 짙은 구름사이로 해가 가끔씩 얼굴을 내밀었다.
겨울이 오기전 지붕을 손봐야겠다.
바람이 불때마다 삐그덕 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것이 아닌가.
소리와 함께 선듯한 바람마저 집안을 한바퀴 도는것이었다.
성 외곽에 집을 지은지도 20년이 흘렀네.
집도 같이 나이를 먹는다.
집안으로 연신 햇빛과 바람과 풀냄새가 들어오곤했다.자그마한 여치도..
집뒤에는 커다란 떡갈나무 한그루가 있어 바람이 불때면 와랑와랑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겨울이 되면 떡갈나무는 고마운 땔감을 나눠주곤했다.
숲은 영주의 몫이라 함부로 들어갈수 없었다.
땔감이 귀해 집안에는 화덕이 없다.
빵을 구울라치면 마을사람 모두모여 한꺼번에 구워야했다.
오늘은 밀을 빻아야겠다.
가르트네 방앗간에 가서 한자루 부탁해야겠다.한줌은 수고비로..
벌이 잉잉거리며 부지런히 꽃사이를 날아다닌다.
떡갈나무 사이에 꿀이 여문다.
꿀이 다 차면 시장에 내다팔어 옷감 한벌을 끊어야지.
성으로 가는길에는 이름모를 들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언제나처럼 다시 피겠지.
손끝으로 꽃송이를 툭쳐보면 그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이윽고, 성안으로 들어서자 반기는건
왁작지껄 소음이었다.
"자..자 내 말을 들어보시오.
지금 수도에선 큰일이 났다오..!"
사람들이 유랑악사곁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 글쎄 교황님이 거리 행차중에 말에서 떨어지지 않아겠소."
사람들의 탄식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도 궁금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유랑악사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곤했다.
"요한스 교황님이 떨어진자리에는 피가 홍건하지 뭐야..
다들 놀라서 가까이 갔지."
유랑 악사는 입술을 한번 훓은후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아..그런데 진짜 놀라운건 그 핏자욱 사이로 아기가 있다는거야..!"
"말도 안돼..!"
"이런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구..!"
"오 하느님..!"
여기저기서 욕설과 고성이 터졌다.
말도 안돼..!
교황이 아기를 낳다니..!
믿을수 없는 얘기다.
"아아..지금 수도에서는 쉬쉬하지만, 다 아는 얘기라고"
"자자..이제 재밌는 소식을 들었으니 소식값을 좀 주시오"
유랑악사의 말에 더러는 푼돈을 쥐어주고 몇몇은 그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악사는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그순간 교회의 종소리가 낮게 시간을 두고서 천천히 울리기 시작했다.
교황이 죽었다.
부고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에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고 말았다.
하..
교황은 주교로 있던 시절, 가난하고 아픈이를 치료해준걸로 칭송이 자자한 분이셨는데..
이윽고, 방앗간에 도착하여 짊어진 밀한자루를 내려놓았다.
주인인 가르트가 땀을 뻘뻘흘리며 밀을 빻고있었다.
"어이, 가르트..이것좀 빻아줘."
가르트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하이린히..이것 끝나는대로 빻아주지."
"얘기 들었어?"
"그럼, 벌써 성안에 소문이 쫙 돌았지“
”진짜일까?"
"진짜겠지. 전부터 소문이 돌았거든"
세상에..
해는 정오를 지나 빛을 잃고 뉘여뉘엿 지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 술한잔이 절실했다.
발걸음을 술집으로 옮겨 걷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목발을 짚고서, 혹은 눈 먼 어린 거지가 떼지어 몰려들었다. "오.! 나으리 어제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한 푼만 적선하세요."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한푼씩 쥐어주었다.
어린 거지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아이고..나으리 감사합니다요"
"나으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신이 갚아 줄 것입니다.."
'신이 갚아 준다'
더 많은 거지떼가 몰려 오기에 발걸음을 빨리놀려야했다.
마침, 저 멀리서 붉은색 코트를 입은이가 걸어 오고 있었다.
헨센이다.
헨센이 가까이 걸어올수록 내 곁으로
모이던 거지떼가 썰물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헨센은 사형집행인이었다.
최하층 빈민.
하지만, 나는 헨센을 그리 피하지는 않았다. 페스트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 헨센은 조심히 나의 부모님을 묻어주었다.
손을 흔들자 헨센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한잔 하러 가나?"
"내가 사지“
"좋지"
사형집행인은 돈을 잘번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만, 가게주인에게 신분을 밝히고
다른 손님에게 양해를 구해야한다.
술집안은 어두컴컴했다.
눈이 익을때까지 오도카니 서있었다.
이윽고, 사형집행인만의 자리에 앉았다.
조그만 탁자에 벽에는 전용 술잔과 식기가 굵은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헨센은 작은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팔꿈치를 괴었다.
주인이 커다란 오크통에 맥주를 가득 채워왔다.
진한 흑맥주의 향기를 음미하며 목안 가득 들이켰다.
캬아.. 맥주의 온도는 미적지근 했지만, 맛은 시원했다.
"요세프 얘기 들었나?"
헨센이 커다란 잔을 깨끗이 비운후 나즈막하게 얘기했다.
"들었지..안된 일이야"
"한방에 목을 친다는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래, 쉽지 않지"
"그 일이 있은후론 나도 긴장이 되"
"하하..자네는 전설의 헨센이잖아.!"
"글쎄, 나도 언젠가 실수하면 군중의 손에 갈기갈기 찢길지도 몰라"
그랬다.
사형집행인이 한 방에 목을 치지 못하면 뭇매를 맞거나 군중의손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가엾은 요세프는 한 방에 목을 치지 못하고, 다시 내리친다는게 죄수의 어깨를 쳤다.
화가난 군중은 그에게 무수한 돌멩이를 던지고 때리고 마침내 숨이 끊어진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던것이다.
헨센과 나는 다시금 맥주를 비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기들의 얘기에 흠뻑 빠져있었다.
우리의 얘기가 들리지는 않을듯.
나는 헨센에게 궁금한것을 물어보았다.
"이것봐! 얘기 들었어. 교황이 아기를 낳았다는 말."
"쉿..! 큰일날 소리 하고있군"
"흠. 정말이군"
"지금 성안이 발칵 뒤집혔어..조만간 입막음을 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시작할거야"
"마녀사냥?"
"그렇지..누구나 '마녀'로 몰리면 죽음을 피할수 없다구"
"마녀의 소행으로 몰 생각이군"
"조심해! 원한을 사지마..몰리면 끝이라구!"
착하게 살아야 되는 이유가 된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면 '마녀'로 몰리곤했다.
여름의 끝자락.
하늘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휘적휘적 집을 향해 걷노라니, 선듯한 바람이 붉은 뺨을 식혀 주었다.
발걸음을 멈추면 풀벌레 소리도 뚝하고 끊기곤했다.
하늘도 땅도 모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거나하게 취해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땅거미는 어둠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집에 가까이 다가 가자 먼저 반기는건 떡갈나무의 서걱거림이었다.
초에 불을 키고 가져온 밀가루 푸대를 침대 한켠에 내려놓았다.
술기운으로 기분은 한껏 들떠 쉬이 잠들지 못해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창가에 어스름한 달빛이 고요히 비추었다.
어느순간 스르륵 잠이 들었다.
***
처음에는 꿈결에 나는 소리인줄 알았다.
차츰 소리가 뚜렷해졌다.
"응애..응애.."
뭐지?
내가 잘 못 들었나?
아니다.
분명 아기의 울음소리가 맞다. 그 것도 바로 문 밖에.
나는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달려나갔다.
아이고. 머리야.
간밤의 숙취가 몰려왔다.
머리를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이런.
진짜 아기가 있었다.
하얀 요람안에 갓난쟁이가 포대기에 싸여 울고있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집안으로 아기를 들였다.
요람안을 살펴보니 쪽지 한장과 주머니 하나가 들어있었다.
쪽지에 적힌것은 이름 한글자 뿐이었다. '요한나'
주머니에는 20실링이 들어있었다.
요람을 살펴보니 꽤나 비싼 고급품이었다. 귀족이나 쓸.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입을 덜기 위해 종종 수도원과 교회에 갖다 버리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이렇게 남자 혼자 사는집에.
그것도 성 외곽에 사는 집에 버리는 일은 없다. 결단코.
넘치는 고아들은 나쁜 어른들에 잡혀 팔이나 다리를 잘리거나
혹은 장님이 되어 동냥질에 내몰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헨센의 말이 떠올랐다. '마녀사냥'
큰일이구나!
당장 떠나지 않으면 화형장의 불꽃 신세로구나!
부랴부랴 아기와 몇가지 짐을 챙겨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 안개속에 집은 서서히 불타기 시작했다.
***
'태양의 길’
사람들은 남쪽으로 난 길을 '태양의 길'이라 불렀다.
일단 수도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져야 했다.
해는 머리위에 떠있어 무척 더웠다. 땀이 비오듯했다.
급히 나오느라 물을 챙기지 못해 목이 탔다.
잠시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잎사귀에 달린 물방울을 모아 아기의 입술을 축였다.
아기는 손가락에 묻은 물방울과 꿀을 강한 생명력으로 빨아들였다.
요람속에 고이 잠든 아기를 안고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멀리서 인기척이 들리면 숲에 숨곤하여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하루를 꼬박 걸어 남쪽 마을에 도착하였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영주가 술과 음식을 탐한다고 한다.
그 생각을 하니 하루종일 먹지못해 배가 고팠다.
아기도 젖좀 물려야 할텐데.
마음이 급해졌다.
마을의 여기저기 문옆을 살피었다.
유랑악사 혹은 도둑들이 문옆에 은밀하게 표시를 해놓곤했다.
'여자 혼자 사는 집'
'주인의 성격이 나쁜 집'
'매 맞는 집'등등 문옆, 눈에 띄지 않는곳에 은밀하게 표시를 해놓았다.
성외곽과 가까운 안쪽 허름한집에 '여자 혼자 사는집'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문을 두들기자 머리가 하얀 노파가 나왔다.
"제발..문좀 열어주세요. 아기가 있습니다."
"제발..하룻밤만 부탁드립니다..!"
노파는 내 얼굴과 아기를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 마을 사람이 아니군. 어디서 오셨소?"
"네, 저 윗마을 사는 하이린히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마을까지 온거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문 앞에 아기를 놓고 가지 않았겠습니까"
"으응? 그것 참 이상하군. 수도원이 아니구?"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노파는 아기와 요람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요람의 품을 보니 예사 물건이 아니구만. 필히 귀족의 물건이야!"
"맞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했지요"
"하아.."
노파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내게 묽은 스프를 건네쥐었다.
"내 잠시 동네에 나가 유모어미의 젖좀 얻어오지"
"고맙습니다. 정말."
노파가 나가고 나는 허겁지겁 스프를 들이켰다.
방안은 촛불에 일렁여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디선가 집안으로 바람이 들어오나 보다.
벽면에 특이하게 검은 십자가가 거꾸로 걸려 있었다.
기괴하군.
얼마 지나지않아 노파가 단지 하나를 품에 안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노파는 손가락에 젖을 찍어 조심조심 아기의 입에 젖을 흘려 넣었다.
아기는 힘차게 노파의 손가락을 빨아댔다.
젖을 다 비우자 아기는 곤히 잠들었다.
나도 잠이 오기 시작했다.
노파는 바닥에 잠자리를 봐주었다.
"오늘 하룻밤만이야. 더 이상은 곤란해"
"네. 감사합니다. 내일 일찍 나서겠습니다"
노파는 검은 숄을 깊숙이 두르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불을 끄자 창가의 달빛이 환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달 빛이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모기 소리일까?
낮게 흐느끼는 듯한 알수 없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살며시 눈을 떴다. 달 빛이 방 안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노파는 벽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를 드리는 듯.
빛이니 어둠이니 드문드문 소리가 났다.
'쾅'
순간 문을 박차고 햇불을 든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요망한 마귀 할멈!"
"마귀와 내통한 마녀!"
나는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마귀다!"
"마귀가 있다!"
무슨 소리 하는거야?
"묶어라!”
사람들중에 대장인듯한 이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꼼짝없이 묶여 얼이 빠져 버렸다.
노파는 손발이 묶여 문을 나서고 있었다.
노파는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하이린히! 원수는 죽이는 것이야!"
"용서하면 안돼.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뭐? 뭐라는거야..!
진짜 미친 할멈이 아닌가?
"빛이 밝으면 어둠 또한 짙어지는 법"
"그림자는 더욱 짙어 질뿐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녀다..!"
"주님의 가르침을 욕보이다니.."
"당장 불태워라..!"
저마다 욕설을 퍼부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떤 여자는 성호를 긋기도 했다.
"어쨌든 재판을 받아야 되니 재판소로 갑시다!"
대장이 말하였다.
그때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뭐지? 아기가 울어!"
"마녀가 마법에 쓸려고 구해 왔나 보군“
"봐봐..여기에 화덕이 있어"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틈에서 몸집이 튼실한 여자가 나섰다.
"저녁때 카타리나가 먼 친척이 왔다고 했답니다"
여자는 노파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기가 있다고 제 젖을 나눠달라고 했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친척이라고..?"
"흠..아기까지 있으니 곤란하군"
"일단 여기에 가둬두고 할멈부터 조사하시죠."
"그래..그게 좋겠군"
사람들이 일단 내 몸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여자가 앞 가슴을 풀고 요안나에게 젖을 물렸다.
"하이린히라고? 일단 너는 여기서 생활하고 추후 조사를 하겠다."
"저는 잠시 들렸을 뿐입니다!“
"조사가 끝날때까지 떠나는 것은 안된다!"
아아..꼼짝없이 잡혔구나.
윗동네의 사건이 알려지는것은 시간 문제일것이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새벽 별빛 만이 가득했다.
"이봐요..아기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여자는 여전히 젖을 물리고 내게 물었다.
"요안나..요안나라고 합니다."
"요안나..아주 예쁜 이름이군요"
나는 여인에게 1실링을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오..이런 큰 돈을 다 주시고. 내가 고맙죠. 호호.."
여자는 행복하게 웃었다.
아침이 되자 나는 밀가루를 꺼내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노파의 이름은 카타리나.
약초를 캐어 이런저런 약물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약물을 만들기 위해 이런 훌륭한 화덕이 있었던것.
약효가 좋았던지 화덕옆에는 땔감이 그득했다.
요안나는 침대위 요람안에서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요안나에게 젖을 물린 여자의 이름은 조안이라고 했다.
조안은 시간 되는데로 젖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당분간 요안나 걱정은 끝.
빵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찰진 반죽에 꿀을 붓기 시작했다.
꿀이 들어간 빵은 들어본적이 없다.
방앗간 주인 가르트가 알려준 비법이었다.
뉘른베르크의 성주는 빵에 꿀이나 딸기, 블루베리를 넣어 먹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빵인가?
조안이 들어서며 황홀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천국의 향기가 가득하군요..!"
"조안. 잘 됐어요. 방금 만든 빵입니다. 들어보세요."
조안이 빵을 받아들고 기쁜듯 한 입 베어물었다.
"오..하이린히.! 천국이 따로 없네!"
"이건 천국의 맛이야..단연코 당신은 마귀일거야!"
조안은 흥분에 들떠 큰소리로 '주여'를 연방 외쳤다.
서민에게는 빵조차도 사치였는데 꿀까지 넣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나도 빵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 입 안 가득 퍼지는 부드러움.
달콤한 향과 맛이 그 뒤를 잇는다.
황홀했다.
이게 진정 지상의 음식이란 말인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맛이다.
조안은 요안나에게 젖을 물리며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었다.
성안에는 한창 마녀사냥으로 시끄러웠고 카타리나는 재판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이었다.
수도에서는 요한스 교황의 후임으로 클로멘스 2세 교황이 선출 되었다고 한다.
클로멘스 2세.
큰일이군.
사치와 낭비의 대명사.
가뜩이나 없는 재정에 구멍을 더욱 크게 낼 모양새.
십자군 전쟁에 여기저기 교회와 수도원 공사.
교황청의 창고는 날마다 허물어지고 이제는 창녀에게 마저 '면죄부'를 팔았다.
창녀가 처녀가 되는 시대였다.
"글쎄..튀빙겐에서는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대요!
손마다 낫이며 가래를 들고 성안으로 쳐들어 갔다지 뭐예요"
"오! 그래서 어떻게 됐답니까!"
"큰 싸움이 났대요! 여기저기 많은 사람이 죽고 결국 성은 농민의 손에 떨어졌지만.."
"오..그거 대단하군요!"
"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우물쭈물 한다네요"
"힘만 있지. 머리가 없으니.."
그렇다. 그들을 이끌 정신적인 지도자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안이 빵의 판매를 맡기로 했다.
나는 부지런히 밀과 꿀을 사들였다.
소문은 금방 났다.
"오오..감사합니다. 주님!"
사람들마다 감탄하며 나를 칭송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빵의 예수라 불렀다.
빵예수.
나는 빵으로 천국의 문을 열었다.
드디어, 카타리나는 모진 고문끝에 허물어져 버렸다.
'마녀'임을 인정했다.
날짜가 정해지고 광장에 화형장이 만들어졌다.
아침부터 짙은 구름으로 흐린날이었다.
오늘은 총 여섯명이 화형에 처해지는 날이었다.
여섯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나뭇가지와 역청으로 단의 밑을 채웠다.
천천히 카타리나와 마녀로 지목된 5명의 모습이 보였다.
'마녀'에는 남자와 소년도 끼어있었다.
그야말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갑자기 카타리나가 뾰쪽한 목소리로 외쳤다.
"빛이 빛날수록 어둠은 커지리라!"
"원수를 죽여라!"
"나는 천국에 임하나 나를 죽인자들은 지옥에 떨어질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주교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 마녀의 혓바닥을 잘라라..!"
병사 하나가 칼을 꺼내 카타리나의 혀를 잡고 칼을 그었다.
금세 시뻘건 피가 옷위로 뚝뚝 떨어졌다.
카타리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웩웩거리며 화형대에 몸이 묶였다.몸부림치는 카타리나 옷위에 불길이 붙었다.연기와 불꽃으로 광장은 금세 울부짖음으로 가득찼다.
사람들은 공포와 황홀경이 뒤섞인 얼굴로 '마녀 죽여라!'를 연신 외쳤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광장은 살타는 냄새와 흥분한 사람들의 외침으로 지옥이 되어 버렸다.
나는 요안나의 눈과 귀를 가렸다.
조안은 입을 벌린채 광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로 밤마다 화형장의 불길속에서 불타는 꿈을 꾸었다.
깨보고나면 꿈이었지만, 잠들기 두려웠다.
요안나는 옆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두렵다. 죽는다는것이.
나는 나중을 대비해 조안에게 요한나를 부탁했다.
조안에게도 빵에 꿀을 넣는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요안나가 조금 더 풍족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어찌보면 조안이 요안나의 엄마이기도 했다.
조안은 유모어미로서 자기 아이들만 여섯이었다.
거기에 요안나까지 키운다면 형편이 어려울것이다.
이래 저래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올것이 왔다.
마녀재판소는 낮인데도 사방이 가로막혀 매우 어두웠다.
역청의 그을림과 퀴퀴한 곰팡이로 벽은 얼룩져 있었다.
나는 손발이 묶인채로 의자에 앉혀졌다.
주위에는 재판관과 주교 그리고 형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사마귀처럼 생긴 재판관이 입을 열었다.
"하이린히! 그대는 자기가 마귀임을 인정하는가?"
"아닙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저 하룻밤 묵어가는 나그네였을 뿐입니다!"
"그래...아기는 뭐지?"
"아기는...차마 말할수 없는..여인에게서 부탁 받은 아기입니다.“
”흥. 웃기지 마라. 너는 저 윗동네에서 살아오는 동안 어느여인과도 사귄적이 없고, 또한 성의 외곽에 살지 않았더냐!"
나는 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하였다.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짓던 재판관은 주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푸짐한 얼굴의 주교는 잔뜩 지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이린히..스스로 마귀임을 인정하느냐?"
"오..아닙니다. 아닙니다. 주님께 맹세코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쯔쯔..아직도 마귀에 씌여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구나. 불쌍한것"
주교는 형리에게 손짓을 하였다.
형리는 쇠로 만든 장갑을 내 손에 끼우더니 그 끝을 단단히 채웠다. 손 끝에 날카로운 송곳이 느껴졌다.
공포가 밀려왔다.
천천히 쇠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누르자 송곳이 손톱 밑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잇사이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악....제발"
"제발......"
제기랄. 제발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불고문과 몇가지 고문을 더 겪은후에 '마귀'임을 인정하고 말았다.
몸 여기저기가 상처가나고 영혼마져 피폐해졌다.
사형 당일이 되자 형리는 옷을 모두 벗기더니 새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였다.
광장에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조안은 초조한 심정으로 사형대 위를 쳐다보았다.
어린 요안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조안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사형집행인과 검은 두건을 둘러쓴 사형수가 올라왔다.
오늘은 화형이 아니라 참수형이었다.
날이 잘 선 커다란 도끼에서 빛이 반짝였다.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죽여라!'
'죽여라!'
'마귀를 죽여라!'
사람들의 외침에 놀라 요안나가 큰 소리로 우는순간,
사형집행인의 도끼가 사형수의 목을 잘랐다.
두건에 싸인 목이 피를 뿜으며 땅에 떨어졌다.
조안은 눈을 감았다.
'오..주여..!‘
***
두건을 벗기자 조그마한 창으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온듯 하다. 작은 방안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한 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 내 앞에 서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굵은 눈썹이 강인한 모습의 남자였다.
"하이린히라고..?"
나는 잠시 할말을 잃어 가만히 있었다.
"후훗..놀란 모양이군"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빙그시 웃음을 지었다.
"빵을 잘 만든다고..?"
"누구신지요..?"
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무슨 상황인지 궁금하겠지.나는 이 성의 성주 율리히라고 한다."
"네...에..?"
나의 눈동자는 놀라움으로 커졌다.
성주가? 성주가 왜 나를?
살려 주었단 말인가?
성주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이린히, 제법 똑똑하더구나..
집을 불태운건 잘한 일이었다. 강도를 당하고 불태워진걸로 말을 맞추었다. 물론 너와 아기는 죽은걸로."
"요안나! 요안나는 살아있습니까?"
나는 울부짖었다.
"그래..그래..조만간 볼수 있을것이다.
몸에 상처를 낸건 미안하구나. 세상을 속이려면 어쩔수 없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흑흑..
괜찮다. 이 까짓 상처쯤이야. 요안나만 살아있다면.
처음에는 내게 왜 이런일이 일어났을까?
요안나를 내 집 앞에 놓은 누군가를 저주했지만, 지금은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덧 요안나는 나의 목숨이 되어버렸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성 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몇 일후 조안이 찾아왔다.
조안이 품안의 요안나를 내게 건넸다.
요안나는 나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아..! 그 새 많이 자랐구나.
머리숱도 짙어지고 발그레한 볼과 오동통한 볼 살이 귀여웠다.
아기 살내음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감사합니다.
나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조안은 성안의 유모어미로서 일하고 나는 빵을 구웠다.
성주 율리히는 내가 만든 빵을 무척 좋아 하였다.
나는 빵에 우유나 계란을 넣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맛이라며 성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성주 율리히가 모두를 물리고 내게 물었다.
"하이린히 어떠냐?"
"네? 무엇을 말이옵니까?"
"네가 빵의 예수라고 불린다며?"
"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기 일 뿐입니다."
"아니다! 이 성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성. 아니 온세상 사람들에게 맛을 보여줘야한다!"
성주는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어떠냐? 온 세상 사람들이 배불리 맛있는 빵을 먹는 세상을!"
무슨소리지?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율리히 성주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보아라! 나는 땔감을 구하는 이들을 위해 숲의 출입을 허락하였다. 누구든지 숲에서 나무를 할수있다. 집마다 화덕을 짓고 빵을 구울수 있도록 했다."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이린히..하지만 밀과 꿀. 이것은 내 힘만으론 부족하다.
떠나라! 동방에는 밀과 꿀이 산더미처럼 있다는구나!"
율리히 성주는 눈빛을 빛내며 입을 떼었다.
"5일후 소년십자군이 오면 네가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거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밀과 꿀로 채우거라!"
성주는 욕심이 많았다.
결국, 군중의 환심을 사고 세력을 넓혀갔다.
농민들은 함락한 성마저 율리히 성주에게 받쳤다.
영토가 넓어지자 곡식 수확량이 늘어났다.
하지만, 꿀의 생산량이 하루 아침에 늘 수는 없는법.
눈을 새로운 땅으로 돌렸다.
동방의 어디에선가 꿀이 자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율리히는 꿀이 자라나는 나무에 욕심을 내었다.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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