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닭'은 박근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 다시 읽어보면 박근혜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침몰하는 배에서 절규하듯이'라는 부분은 세월호를 염두에 쓴 부분이 아닙니다만, 다시 읽어보면 세월호를 염두에 두고 쓴 대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더 재미있는 소설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다시 읽어보니 낯뜨겁기도 하고 재밌기도 그런 마음이 듭니다.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의 이름(두환, 영삼 등)을 다른 이름으로 수정하고, 5시 16분같은 상투적인 설정도 빼고... 여튼 좀 많이 수정해서 단편 공모전에 내거나 출판을 할 때 원고로 함께 엮을까 합니다. 읽고나서 감상을 말씀해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광장의 바닥은 회색의 벽돌로 짜여져 있었다. 그 벽돌들 위에는 미세한 먼지들이 앉아 있었고, 7월의 뙤약볕이 그 먼지들을 톡톡 굴리고 있었다. 광장의 한가운데 시계탑이 있었는데 시계 바늘은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5시 16분에 멈춰 있었다. 광장의 한 쪽 끝에는 학생회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누런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마다 기우회, 허리케인, 대학 신문사, 교지편집위원회, 극예술연구회 등 한 때는 깨끗했을 지도 모르는 선팅된 글자들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광장의 반대쪽 끝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을 따라 또 다른 누런 건물들이 몇 개 보였다. 그 건물들의 입구에는 그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학생, 바퀴에 쇠사슬을 칭칭 감아놓은 자전거 두어 대, 죽었는지 자는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여름의 햇볕이 모든 것을 다 소독해버린 것 같은 날이었다. 잠깐 잊고 있다가 문득 기억이 났다는 듯, 매미가 울었다. 잠시 후 계단으로 흔들흔들 머리통이 하나 나타났다.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건빵바지에 카키색 나시 차림. 남자는 산 정상이라도 정복하듯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더니,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 당긴 후, 거수경례라도 하는 듯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담배를 입술에서 떼고,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7월의 뙤약볕 아래서 담배 연기는 맥없이 흩어졌다. 남자는 서너 번 담배를 더 빨다가 바닥에 꽁초를 버리고는 학생회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의 뒷모습은 어쩐지 연어를 닮아 있었다. 남자는 바싹 마른 강을 헤엄쳐 가는 물고기처럼 7월의 대기를 뚫으며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김명목 씨, 명목 씨가 극단 조명 설치 기사 노릇을 관두고 학교를 다시 찾은 것은 굳이 대학교 졸업장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에러라고 하던 동료들의 핀잔 때문도 아니었고, 지난 겨울 조명을 달다가 아시바에서 떨어졌을 때 병원비 십 원 보태주지 않고 공연 일정에 차질 생겼다고 화만 내던 극단 대표에게 삐쳐서도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고졸이라 괄시 받긴 했지만, 사실 변변찮은 지방대학 졸업장쯤이야 없어도 되고, 이방인의 수준을 넘어서 반외국인처럼 자기 의사의 절반도 표현 못하는 경상도 촌놈으로 살았지만 그것 역시 참을 만한 것이었다. 아시바에서 떨어진 것은 졸다가 실수로 떨어진 자기 잘못이지, 하루 16시간 근무를 시키던 극단의 책임은 아니니 그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엊그제 대역 건만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얼마 만에 따낸 배역인가. 5년 동안 용돈도 안 되는 월급 받아가면서, 공연 있을 때는 아시바 타고, 공연 없을 때는 노점해가면서 고시원에서 쪽잠 자면서 얻은 첫 배역을, 발음 조금 틀렸다고 그렇게 한 번에 내친다니, 그게 말이 되는 노릇인가.
“거실에 스탠드를 ‘그실에 서탠드’라고 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 경상도 촌놈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런데 새꺄. 도대체 ‘스실에 거탠드’는 어디서 나온 말이야?”
주연배우를 비추던 베이비 조명이 꺼지고, 파 조명이 켜질 때 머리 속이 하얗게 증발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조명을 무서워하는 연극배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거실에 스탠드. 어 발음과 으 발음 지적을 너무 많이 받아서, 무대 입장하기 직전까지 계속 거실, 거실, 스탠드, 스탠드 했는데, 결국에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스실에 거탠드’가 어디에서 튀어나와버린 걸까.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명목 씨에게 목장갑과 껌 제거용 끌이 주어졌다.
“매표소 주변의 껌이나 떼.”
쪼그리고 앉아서 껌을 떼고 있는데, 두 번째 공연 대역으로 들어간 배우의 정확한 발음이 밖에서도 또록또록 들렸다.
“혼자 몰래 거실에 스탠드 불을 켜놓고.”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소극장 유리창과 문틈 사이로 삐쳐 나왔다. 잠시 후 공연이 끝났을 때 명목 씨가 있던 자리에는 껌 제거용 검정색 끌 하나와, 겉은 검고 속은 흰 껌딱지 두 개, 그리고 촛농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침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있었다. 조연출은 끌을 들고 잠깐 보더니,끌에 붙어 있는 껌을 시멘트 바닥에 대고 탁탁 쳐서 떨어뜨린 후 소극장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껌딱지들은 다시 바닥에 들러붙든지, 사람들의 발에 치여 먼지가 되든지 할 것이고, 눈물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액체는 금세 마를 것이었다. 그리고 명목 씨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조연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정도쯤은 이미 알고 있어야 조연출이라도 해먹는 것이다.
학생회관 소극장의 뒷문은 열려 있었다. 명목 씨는 뒷문을 열고 소극장으로 들어갔다. 일 년 내내 햇볕 한 번 들어오지 않는 소극장 특유의 습한 시멘트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훅 끼쳤다. 뒷문은 무대 뒤와 연결되어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는 조명들이 놓여 있었고, 간이용 옷걸이에는 금색, 은색으로 조잡하게 장식된 옷들이 걸려 있었다. 무대 뒤편 전체를 관통하는 긴 통로는 전체가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벽에는 이 소극장을 거쳐 간 사람들이 써놓은 낙서들이 곳곳에 있었다. 누군가 공연을 하는 팀이 있는지 별안간 무대 앞 쪽에서 연출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그 장면에서 그 쪽으로 돌면 등이 보이잖아. 반대로, 반대로. 그래, 그렇게 돌아서 무대 우수로 천천히. 아, 아니! 니 내 말 못 알아듣겠나?”
연출자의 목소리에서는 뜸이 돌기 일보 직전의 전기밥통처럼 치지직 뜨거운 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명목 씨는 공연 연습 팀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그야말로 반대로 몸을 돌려 무대의 우수 쪽으로 천천히 나가는데, 발에 물컹한 것이 밟혔다. 그리고는 흰 천으로 덮어놓은 소품들 사이에서 노란머리를 한 남자 하나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고함을 지르는 것 아닌가.
“악!”
명목 씨의 고함 소리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노란머리의 고함 소리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무대 앞 쪽의 연출자의 고함 소리가 먼저였는지, 또 누구의 고함 소리가 더 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연극밥 좀 먹어 발성이 트인 세 사람의 고함 소리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7월의 여름을 꿰뚫을 정도로 우렁찼다.그 어마어마한 소리에 매미도 잠시 우는 것을 멈췄고, 학생회관 맞은편 건물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던 고양이조차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고양이는 하품을 길게 한 후 다시 고개를 묻었고, 매미는 화났다는 듯이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누구십니꺼?”
진득한 경상도 억양이었다. 배우들은 모두 객석에 앉아 있었고, 명목 씨는 연출자와 노란머리에게 팔을 잡힌 채 무대 앞으로 끌려갔다. 팔을 잡아챈 손아귀의 단단한 힘이 명목 씨를 좀도둑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요? 저는 무명인입니다. 저도 한 때는 이름이라는 게 있었겠지만, 지금은 잊어버렸어요. 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저는 시를 썼어요. 기억납니다. 혼자 몰래 거실에 스탠드 불을 켜놓고 시를 쓰던 기억이. 그 때는 제게도 이름이 있었겠죠? 그러나 지금은...’
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어린 대학생 배우들은 객석에 앉아 눈을 반짝이며 명목 씨를 보고 있었다. 명목 씨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원래 하려던 대로 과사무실에 가서 복학 신청을 하고 중고 서점에 가서 공무원 수험서를 사갖고 집으로 갔어야 했다. 괜한 감상에 젖어, 마지막으로 한 번 와본다고 소극장으로 온 것이 이런 참사를 낳을 줄이야.
“아니, 누구신데 학생 소극장에 함부로 들어오십니꺼?”
키는 작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학생 연출자가 명목 씨를 추궁했다. 옆에 선 노랑머리에게 손짓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라는 것으로 보아 아마 경찰에 연락을 하려는 것 같았다.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릴 판이었다.김명목이라고 해볼까. 5년 전에 학교 그만둔 사람이라고. 5년 전에 그만둔 사람이 왜 학교를 다시 와? 그것도 소극장 뒷문으로. 궁색하다. 명목 씨의 머리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오가는데, 연출자가 또 한 번 물었다.
“누구십니꺼?”
세 번이나 재차 반복되는 질문에 명목 씨는 아마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울 극단에서 못한 연기를 이 무대에서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울 극단 연출자에게 쪼이던 것이 무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연극을 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선보이는 것으로, 자신은 도둑이 아니라 연극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였을 지도 모른다. 하긴 어떤 쪽으로 변명을 갖다 붙이든 그 짓이 미친 짓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저요? 저는 무명인입니다. 저도 한 때는 이름이라는 게 있었겠지만, 지금은 잊어버렸어요.”
“예? 이름을 모른다꼬요?”
시선은 중앙, 몸의 각도는 전방 15도, 서서히 무대의 좌수로 움직이며, 옆걸음은 치지 않는다. 명목 씨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약 7:3 정도의 비율로 표준어와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연출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객석에 앉아 있던 배우들 중 한 명은 크게 하품을 했다.
“아니, 그러면 극장으로는 대체 뭐하려고 들어왔는데예?”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저는 시를 썼어요.”
“시- 요?”
연출자는 이 미친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표정이었고, 배우들의 절반 정도는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으며, 나머지 절반 정도는 갑자기 등장한 미치광이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었다.
“그래요, 기억납니다. 혼자 몰래 거실에 스탠드 불을 켜놓고 시를 쓰던 기억이.”
이번에는 완벽했다. 그실도, 서탠드도, 서실도, 그탠드도, 스실도, 거탠드도 아닌 완벽한 거실에 스탠드.이렇게 하면 될 것을. 명목 씨가 어느새 자신의 연기에 푹 빠져 뿌듯해하고 있는 동안 연출자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결심하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그 때 마침 극장의 정문이 열렸다. 크고 육중한 정문이 열리면서 암막 처리된 극장으로 7월의 강한 햇빛 한 가닥이 들어왔고, 그 햇빛은 정확하게 무대 위의 명목 씨를 비추었다. 마치 주연 배우의 단독 조명처럼.
“그 때는 제게도 이름이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은...”
“이 무슨 미친 놈이...”
“맹목이 행님 아입니꺼?”
이 세 사람의 말 중에서 어떤 말이 먼저 울렸는지는 모른다. 열린 정문에서는 얼마 전에 이 학교를 졸업한 선배가 비닐봉지에 간식을 사와 들고 있었고, 무대 위에 명목 씨는 강한 햇빛을 받으며 연기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연출자는 미친놈에 대한 짜증과 선배의 방문에 대한 반가움과 그 선배가 저 미친놈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데 대한 놀라움이 한 데 섞여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배우들 역시 엉거주춤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정문 쪽에 섰던 선배가 비닐봉지를 바닥에 놓고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배우들과 연출자는 영문도 모르고 함께 박수를 쳤다. 명목 씨는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명목 씨를 비추던 햇빛은 텅 빈 무대를 비추고 있었고, 그 태양광선 속에서는 먼지들이 천천히 뱅글거리고 있었다.
“맹목이 행님이 다 만들어 놓으신 거 아이가.”
양념 통닭의 잔해물들이 탁자 곳곳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탁자는 침몰 직전의 뗏목처럼 상판이 비뚤어져 있었고, 곳곳이 썩어 있었다. 녹색의 소주병들이 탁자 한 쪽 귀퉁이에 일렬로 도열해 있었고, 그 병들을 옆에 끼고 명목 씨가 앉아 있었다. 명목 씨는 슬쩍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공무원 수험서를 사기 위해 빌려온 아버지의 카드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 전화기로 야밤에 통닭집 이름으로 몇 만원 청구서가 날아가는 것을 생각했고, 내일 아침 명목 씨에게 날아올지도 모르는 재떨이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들고 온 선배, 그러니까 명목 씨의 후배가 되는 두환 씨가 후배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담배 한 모금 쭈욱 빨더니 재떨이에 재를 탁탁 털었다. 두환 씨는 재떨이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었고, 그 옆에 앉은 남자 후배는 입을 크게 벌려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너거 지금 공연하는 거, 전부 다 여기 계신 맹목이 행님이 만들어 놓으신 기다. 무대 예절, 발성법, 연출,조명, 음향. 앙? 그런 거를 맹목이 행님이 다 만드신 거 아이가? 그런데 자슥아. 맹목이 행님을 도둑이라고 착각을 하면 우짜노?”
명목 씨와는 반대편 구석에 앉아 있던 연출자가 달려와 무릎을 꿇고 명목 씨에게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행님, 몰라 뵈서 진짜로 죄송합니더.”
명목 씨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주잔을 받아들고 입 안으로 털어 넣으며 곰곰이 지난 일을 생각해봤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존재감 없이 지내다가, 연극이라고는 쥐뿔도 모른 채, 그저 그럴 듯한 이름에 혹해서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했다. 극예술연구회에서도 제대로 된 배역 하나 맡지 못하고 조명,음향 스텝으로만 주로 활동하다가 학과 내에서 처음으로 원어 연극을 한다기에, 그 때 연극을 연출한 것이 명목 씨가 기억하는 인연의 전부였다. 그 원어 연극이 아주 대성황이었다거나, 예술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거뒀다면야 오늘의 이 환대가 별스럽지도 않겠지만, 명목 씨의 기억으로는 당시 원어 연극은 기껏해야 배우들의 가족과 친구 몇 명, 학과 교수 몇 분을 모시고 치른 썰렁한 학예회 수준의 공연이었다. 게다가 대사 자체가 일반인에게 생소한 독일어다 보니, 보다가 자는 사람, 아예 나가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 등 엉망진창이었고 결국 4회로 예정되었던 공연을 3회 만에 끝낼 수밖에 없었던 망한 공연이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명목 씨는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주머니에 손을 넣어 플라스틱 카드를 어루만졌다.
“두환이 행님한테서 맹목이 행님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제가 몰라봤습니더. 두환이 행님 말씀으로는 그 때 공연이 진짜 대단했다고 하던데예. 그라고 그 때 공연했던 선배님들이 거의 다 예술계통으로 계신다던데, 오늘 맹목이 행님을 만나게 되어서 진짜로 영광입니더.”
그 때 같이 공연했던 후배들이라... 명목 씨는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허허 웃으며,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려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배우들이 예닐곱 명, 스텝 들이 서너 명. 명목 씨 기억으로는 그 중에 최소 일곱 명 이상이 자퇴, 편입, 전과를 선택했고 그나마 제일 잘 된 후배가 일찌감치 학과 생활, 동아리 생활 접고 취업 공부해서 농협에 취직한 후배, 나머지는 연락도 안 되고 어디서 뭘 하는 지도 모른다. 명목 씨는 곁눈으로 두환 씨를 보았다. 당시의 두환 씨는 연기도 제일 못하고, 얼굴도 못 생긴데다가, 머리숱마저 적어서 제일 비중이 작은 역할을 맡았었는데, 그나마 그 역할도 제대로 소화 못해 늘 명목 씨의 잔소리를 들었던 후배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두환 씨는 달라져 있었다. 살이 쪄서 전체적으로 후덕해진 느낌이었고,얼굴도 예전에 비해 뻔질해 보였다. 무엇보다 두환 씨에게서 좌중을 아우르는 카리스마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심지어 이제 완연해 보이는 대머리의 징후조차 어떤 아우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행님, 후배 뻘쭘하겠습니더. 후배 술 한 잔 주이소.”
두환 씨가 명목 씨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미안할 거 없고, 괜찮다. 이거 참, 내 정신 봐라. 후배는 이름이 우째 되노?”
“예, 행님, 저는 태웁니더.”
“태우?”
“예, 저는 행님들처럼 대단하지는 않고, 그냥 보통 학생입니더.”
태우 씨는 곧 제자리로 돌아가 다른 후배들과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눴고, 명목 씨 옆에 앉았던 두환 씨가 명목 씨에게 굉장히 긴한 이야기라도 하는 듯, 다시 뭔가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명목 씨의 귀에는 두환 씨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명목 씨는 술자리에 앉은 후배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제 갓 이십대를 넘은 남녀 학생들, 간당간당하게 4년제 대학의 간판이나 달고 있는 지방의 삼류대, 서로가 서로를 선배, 후배라고 부르며 닭 뼈와 소주병을 사이에 두고 그들끼리 뭔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잡고 더 깊은 곳으로 침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귀에 익숙한 사투리와 자기를 우러러 보는 후배들의 시선에 가슴 뻐근한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은 후배들이 돌아가면서 바치는 소주를 들이키면서 조금씩 섞이는가 싶더니,결국에는 명목 씨 본인이 후배들이 생각하는 맹목 씨가 된 것 마냥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우리가 말이야. 두환이가 말이야. 아, 대단했지. 두환이가 대사를 딱 쳤는데, 관객 구석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꼬. 하도 객석이 가득 차 있으니까 누군지,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알고 보이께, 우는 소리더라꼬. 독일어로 연극을 하는데도 그거를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관객이 듣고 울 정도라 카면 알겠나?”
“아, 행님. 쑥스럽구로. 행님이 그래 가르쳐 주신대로 했는데, 자꾸 그라지 마이소. 우리야 관객들 감동시키는데 그쳤지만서도 행님은 우리들을 감동시킸다 아입니꺼. 자자, 뭐하노. 퍼뜩 잔 들어라. 한 잔씩 하자.”
잔을 치고 목구멍으로 털어넣으려는 순간, 통닭집의 문을 열고 이십대 초중반의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숏팬츠 아래로 뻗은 길고 하얀 다리, 흰 티셔츠 위로는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긴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얼굴은 둥근 편이었으나, 눈, 코, 입이 선하게 생겨 그 얼굴형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여자는 한쪽 가슴께로 책을 두어 권 안고 있었는데 책을 안고 있는 팔의 각도가 절묘했다. 뒤쪽으로 살짝 꺾인 그 팔의 각도 속에 세상 모든 젊음과 아름다움이 다 녹아 있는 듯 했다. 최소한 명목 씨는, 아니, 술에 취한 명목 씨는, 아니, 술에 취하기도 했고 지난 5년 간 극단에서 말도 못하는 멸시를 겪었으며, 지난 5년 간 단 한 번도 여자를 품어본 적이 없으며, 오늘 이 술자리에서 돌아온 예술 영웅으로 환대받고 있는 명목 씨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명목 씨가 그 여자를 흘깃거리고 있는 사이 여자는 또각또각 걸어서 명목 씨 쪽으로 왔다. 그것도 정확하게 명목 씨와 눈을 마주치면서. 명목 씨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서, 여자를 한 번 흘깃거렸다가 당황하며 탁자 위의 닭 뼈들을 보았다가, 다시 한 번 여자를 흘깃거렸다가 괜스레 잔을 들고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여자는 어느새 명목 씨 바로 앞까지 걸어와 있었다. 여자에게서 시원한 산바람 냄새가 났다.
“오빠.”
오빠. 오빠라니! 명목 씨는 당황해서 들고 있던 소주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예? 오빠요?”
“아, 왔나. 이 행님이 내가 말하던 맹목이 행님이다. 인사해라. 행님 제 애인입니더.”
“안녕하세요.”
여자는 생긋 웃으며 명목 씨에게 인사하고는 두환 씨 옆에 앉았다. 명목 씨는 잠깐 동안 착각을 한 자신의 부끄럽기도 하고, 두환 씨가 부럽기도 해서 표정을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몇 순배 술이 돌고 난 후에 명목 씨는 넌지시 두환 씨에게 물었다.
“두환이 니 애인이가? 니 출세했네.”
“아이고, 행님. 출세는 무슨 출세예. 그냥 연극하다가 만난 사이입니더. 제가 연출하고 이 친구가 조연출 겸 배우했는데 공연 끝나고 그냥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거지예. 따지고 보면 이것도 행님 덕이지예. 제가 행님 덕에 연극을 배웠으니까.”
명목 씨는 다시 한 번 두환 씨와 그의 애인을 살펴보았다.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대머리 총각과 늘씬하게 빠진 청순 미녀와의 조합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명목 씨의 마음을 말하자면 배 아픈 일이었다. 그래도 명목 씨가 두환 씨보다 키도 크고, 머리숱도 많고, 게다가 연극도 가르쳤는데.
“그런데 행님은 아직 애인 없습니꺼?”
“응, 아직 없다. 예술 하는 사람이 애인 사귈 여가나 있나.”
명목 씨의 궁색한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환 씨가 좌중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봐라. 야들아. 맹목이 행님이 아직 애인이 없단다. 후배들 중에서 괜찮은 아아들 있으면 소개 좀 해드리라.”
각자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던 좌중이 순간 집중되더니 여학생들 몇 명의 눈이 반짝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짝였다고 명목 씨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몇 순배 더 술이 돌았다. 두환 씨와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여자 후배들에게 서울 극단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두환 씨와 나눈 옛날이야기는 과장되거나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었으나, 여자 후배들에게 말해준 서울 극단에서의 에피소드는 그 사실 자체로는 진실이었다.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정반대로 각색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진실이란 참으로 재미난 것이었다. 입에서 튀어나와 허공을 떠돌던 이야기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조금씩 각색되고 협의되면서 서서히 진실이 되었고 믿음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신앙이 되고 불변의 진리가 되었다. 어쩌면 이걸 위해서 술을 마시는지도 모른다고 명목 씨는 생각했다. 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며 소주를 또 들이켰다. 통닭집의 탁자가 뱅글뱅글 돌았다. 탁자 위의 닭 뼈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두환 씨가 웃으면서 후배들에게 잔을 치고 있었는데 두환 씨와 후배들은 다들 바닥으로 꺼지고 있었다. 이건 누구를 위한 술자리일까. 이건 마치 죽은 닭에 대한 제사 같구나, 닭은 왜 죽었는데요? 야이, 병신아. 우리가 먹었으니까 죽었지ㅇ, 우리가 먹고 우리가 제사를 지낸다고요? 그럼 우리가 먹었으니 우리가 제사를 지내야지. 이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술자리의 후배들은 침몰하는 배에 탄 승객들처럼 필사적으로 악을 썼다. 닭의 뼈들은 계속해서 늘어갔고, 명목 씨는 계속해서 목구멍으로 소주를 털어 넣었다. 명목 씨는 물에 젖은, 아니 그런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술에 젖은 종이처럼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선배, 이제 좀 괜찮으세요?”
사투리의 억양 위에 표준어의 어휘를 얇게 입힌 목소리가 명목 씨 귓가에서 울렸다. 명목 씨는 눈을 떴다.흰색 침대였다. 그리고 명목 씨는 옷을 다 벗고 있었다. 명목 씨의 검은 몸이 흰 색의 커버 위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침대 커버 위에 빛바랜 푸른 글씨로 사림장이라는 글씨가 찍혀 있었다. 목과 코에는 솜을 잔뜩 끼워놓은 것 같았고, 속에서 위장이 통째로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으며, 머리는 아예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명목 씨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았다. 명목 씨의 눈앞에 두툼하게 절반으로 접힌 뱃살이 보였다. 뱃살 위, 아래로는 누런색 계통, 어쩌면 본인은 아이보리 색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는 브라와 팬티가 걸쳐져 있었고, 여드름이 듬성듬성 나 있는 얼굴에는 금방 감은 듯한 머리카락이 덩어리져서 군데군데 흘러내려 있었다. 기억난다. 어제 닭 날개를 야무지게 뜯어대던 통통한 후배였다. 이 후배가 선배 진짜 애인 없으세요 라고 물은 것 같기도 하고, 이 후배와 계속해서 소주잔을 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제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어대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행님, 푹 잘 주무셨습니꺼?”
두환 씨의 목소리는 활기로 넘쳤다. 새벽에 일어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명산의 정상이라도 정복한 듯한 목소리였다.
“아, 두환아. 내가 어제 일이 기억이 잘 안 난다. 니 지금 오데고?”
전화기 너머 두환 씨는 잠시 키득거리는가 싶더니, 옆방에서 벽을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렸다.
“행님, 진짜 기억 하나도 안 나가는 보네예. 저 행님 옆 방입니더. 행님하고 해장이라도 해야 되는데, 제가 아침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나가 볼께예. 행님 간만에 회포 잘 푸셨는지 모르겠습니더.”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제 두환 씨 옆에 앉아 있던 산바람 냄새가 나는 아가씨를 떠올렸다. 두환 씨가 국립공원의 명산이라도 정복한 듯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하는데, 전화기에서 두환 씨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전화기에서 울리는 소리와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조금 시간차가 났다.
“행님, 어제 아아들 연극 지도해주신다고 하신 거 기억나시지예? 저도 밤늦게 시간되면 한 번 들리겠습니더. 행님 어제 간만에 즐거웠습니더.”
옆 방에서 달그락거리가 소리가 나더니 복도 앞을 구두 소리가 탁탁 울렸다. 명목 씨는 두환 씨의 대머리와 그 애인의 길게 뻗은 다리를 생각했다.
“선배, 어제 너무 많이 취하셨더라구요. 들어오시자마자 그냥 주무셔서 편하게 주무시라고 제가 옷 벗겨 드렸는데... 죄송해요.”
전화를 끊고 나자 뱃살이 통통한 후배가 명목 씨에게 머그컵에 물을 갖다 주며 말을 붙였다. 컵에도 사림장이라는 여관 이름이 큼직하게 찍혀 있었고, 여자 후배의 뱃살은 걸을 때마다 조금씩 출렁거렸다. 명목 씨는 그 배 속에 들어 있을 닭 날개들을 생각했다.
“그냥 잤다고?”
“예, 많이 피곤하셨는지 그냥 곤히 주무시던데요.”
후배는 명목 씨의 몸 근처로 바짝 붙어 앉아 사투리 억양에 표준어 어휘를 사용해서 말했다. 명목 씨는 어쩐지 억울했다. 자기보다 못난 두환 씨는 늘씬한 애인과 뜨거운 밤을 보냈는데, 정작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영웅인 자기는 이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와 함께 밤을 보냈다니. 게다가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잠만 잤다니. 억울한 마음에 명목 씨는 후배를 넘어뜨리고 그 위로 올라탔다. 후배는 놀라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놀란 척 연기를 하며 짧게 비명을 질렀으나 명목 씨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주었다. 후배는 이미 눈을 감고 명목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목 씨는 후배의 속옷을 벗겼다. 후배는 여자치고는 덩치가 큰 편이었으나 젖가슴이 거의 없었다. 검게 솟은 젖꼭지만이 그 곳이 가슴이라는 이정표처럼 썰렁하게 거기 서 있었다. 가랑이 사이에는 검은 음모가 있었는데, 음모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흰 살갗 위에서 구불구불하게 웃자라 있었다. 명목 씨는 삽입을 하려 했으나, 도무지 발기가 되지 않았다. 후배의 성기 위에 문질러도 보고, 본인의 손으로 자위를 하듯 흔들어도 봤지만 물렁물렁한 성기는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명목 씨는 결국 손가락을 후배의 성기에 넣고 열심히 흔들었다. 후배는 명목 씨의 손가락 움직임에 맞춰 신음소리를 내주었다. 그 때 해가 구름을 지나갔는지, 아니면 그 때 마침 해가 뜬 건지 명목 씨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여관방으로 누런 직사광선이 흘러 들어왔다. 명목 씨는 열심히 손가락으로 성기를 쑤시다가 눈부신 햇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 손은 후배의 성기에 담아둔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여관의 커튼을 치기 위해서 상체를 세우던 명목 씨는 문득 여관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제 극단 앞에서 껌을 뗄 때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이제는 껌 대신 다른 것을 열심히 문질러 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명목 씨는 자신의 성기가 갑자기 왕성하게 발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목 씨의 성기 안으로 별안간 흘러들어 간 혈액의 정체가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혹은 자책인지 그런 것을 따질 틈도 없이 명목 씨는 허겁지겁 후배의 몸속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속은 마침내 돌아온 고향처럼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기 때문에 명목 씨는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닭이라는 말을 들으면 슬퍼진다
닥발, 닥다리, 닥 속에 묻혀버린 ‘리을’때문에 슬퍼진다
그 옛날 창공에서 퍼덕였을 날개의 흔적인 그 ‘리을’은
제 마누라처럼 순한 이응을 만났을 때만
허세를 부린다 닭이, 달기 되어 못난 허세를 부린다
이렇게 활개를 치다가도 날개라는 말을 들으면
저도 부끄러운 것은 아닌지 닭날개는 당날개가 되어버린다
닭은 닥도 달도 아닌, 당으로 동그랗게 움츠려서
옛 꿈 이야기라도 하듯이 물끄러미 제 날개를 바라본다
이래서 닭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슬퍼지고 부끄러워진다
혹시 닭에서 ‘기역’(기억)을 뽑아버리면 닭은 달이 될 수 있을까
몰라, 닭이 달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으나
길고긴 가을밤 하늘 끝에서 끝으로 훨훨 날아 달이 지면은
지 딴에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지, 지상의 닭은 울며 달을 보내기는 하더라.
명목 씨는 무대 뒤의 낙서들을 보고 있었다. 흰 벽 위에 갖은 낙서들이 써져 있었고, 오래된 글 위에 새로운 글들이 또 써져 있었다. 그 중에서 닭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무대 앞 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명목 씨는 무대 앞으로 나갔다. 후배들이었다. 명목 씨는 무대 위에서 껑충 뛰어내려 후배들에게 가는데 후배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명목 씨를 쳐다보았다. 몇몇 인사를 하던 후배들은 인사를 하던 순간 그대로 멈췄고, 인사를 하지 않은 후배들은 그대로 서서 명목 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제, 잘들 들어갔나?”
후배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 자리에 선채로 명목 씨를 보고 있었다.
“와? 무슨 일들 있나?”
잠시 침묵을 지키던 후배들 중 똘똘하게 생긴 남자 후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맹목이 행님, 다른 게 아이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는 반드시 우측 계단, 올라갈 때는 좌측 계단을 사용해야 되는데, 행님이 갑자기 무대 중간에서 뛰어내리셔서...”
“뭐라꼬? 내려올 때는 우측 계단을 이용해야 된다꼬? 그거 누가 정했는데?”
“저희는 태우 행님한테서 맹목이 행님 계실 때, 맹목이 행님이 그렇게 지시했다고 들었는데요.”
“뭐어?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목 씨는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었다.
“뭐라카노. 나는 그런 거 지시한 적 없다. 멀쩡하게 가운데 놔두고 뭐 할라고 좌측 계단, 우측 계단 사용하노. 앞으로는 마음대로 다니라.”
“그래도 행님, 맹목이 행님이 정한 건데 어떻게 함부로 바꿉니꺼?”
“그런데 후배야. 니 이름이 뭐꼬?”
“아, 저예? 영삼입니더.”
“아, 영삼이. 그래, 니 참 집안 살림 잘 말아 묵게 생깄다. 임마! 내가 정한 거를 내가 바꾸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노. 앞으로 계단으로 다니지 말고 무대 중앙, 좌수, 우수 가리지 말고 아무 곳으로나 편하게 다니라. 알겠나?”
영삼 씨는 대답이 없었다. 영삼 씨와 명목 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후배들은 그제서야 이해를 했다는 듯이 가방을 객석에 놓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모두들 좌측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갔다.
“야야, 아아들아. 다시 내려온나. 내려올 때도 올라갈 때도 자유롭게! 알겠나?”
후배들은 머뭇거렸으나, 어제 명목 씨와 함께 밤을 보낸 통통한 후배가 먼저 통하고 무대에서 뛰어내리자 다른 후배들도 웃으면서 무대에서 뛰어내렸다. 그 때 극장 정문이 열리며 태우 씨가 들어왔다. 태우 씨는 명목 씨를 발견하고는 웃으면서 인사를 하다가, 무대에서 뛰어내리는 후배들을 보며 인상을 싹 바꿨다.
“마! 너거들 지금 뭐하노? 어디 신성한 무대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어. 이 새끼들! 무대를 이용할 때는 무대 좌측 계단을 이용한다 모르나? 이거는 말이야, 여기 계신 맹목이 행님이 처음 연극 시작하실 때부터 정해놓은 법칙이야. 이 새끼들아.”
갑작스런 호통 소리에 놀란 후배들은 눈만 껌뻑거리면서 명목 씨를 보았다. 명목 씨는 태우 씨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 태우 왔나? 저래 하라고 내가 지시했다.”
“예? 행님? 행님이 지시했다고요? 행님 저거는 말도 안됩니더. 저거는 우리 과가 연극 시작할 때부터 맹목이 행님이 정해놓은 법칙인데 어떻게 바꿉니꺼?”
“마! 내가 맹목이다. 나는 솔직히 저런 법칙 만든 기억도 안 나고, 만약에 내가 만들었다고 치자, 내가 만든 걸 내가 바꾸는데 무슨 문제가 있노?”
“하하, 행님. 안됩니다. 엄연히 규율이 있는데 연극 무대에서 저거는 안됩니더.”
어젯밤에는 사람 좋아 보이던 웃음으로만 일관하던 태우 씨가 오늘은 의외로 완강했다. 명목 씨의 이야기를 탁 자르더니 배우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마! 다들 무대로 다시 올라가라.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라.”
배우들은 주춤거리며 좌측 계단으로 줄지어 갔다.
“이 새끼들 봐라. 그냥 바로 무대로 올라간다. 알겠나?”
좌측 계단으로 가던 배우들이 다시 주춤하며 무대 아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배우들이 서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의 고함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결국 태우 씨가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명목 씨는 의기양양하게 배우들에게 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지시를 하는데 태우 씨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두환이 행님, 이 행님 진짜 맹목이 행님 맞습니꺼? 맹목이 행님이 연극 룰을 다 바꿀라 하는데, 이게 지금 말이 됩니꺼?”
전화기 속의 두환 씨가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우 씨는 전화를 끊더니 핸드폰을 높이 쳐들고는 바닥에 내팽개쳐서 박살을 내버렸다. 태우 씨는 그래도 화가 안 풀린다는 듯이 전화기를 발로 짓이겼다.태우 씨의 입에서 욕설 비슷한 신음 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명목 씨는 태우 씨의 뺨을 철썩 때렸다. 그리고 한동안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무대 위에 서 있던 1학년 남자 학생, 영삼 씨였다.
“저는 태우 행님 의견에 찬성입니더. 맹목이 행님이 정하신 룰이라 하더라도 그게 지금까지 쭈욱 지켜져 왔으면, 아무리 본인이라도 그거를 함부로 바꾸면 안 되는 거 아입니꺼?”
배우들은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영삼 씨를 보았다. 명목 씨는 당황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로 어제의 영웅이었던 그가 이제는 바로잡아야할 대상, 타도되어야할 대상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우째하자고? 내가 정한 룰을 내가 바꾸면 안된다고?”
명목 씨가 갈라진 목소리로 영삼 씨를 윽박질렀다.
“어차피 지금 연출자가 태우 행님이니까, 태우 행님만 허락하시면 배우들 전원이 투표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꺼?”
“뭐어? 투표? 마, 이런 일에 투표까지 해야 되나?”
명목 씨가 영삼 씨에게 소리를 지르는데, 옆에 있던 태우 씨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허락한다. 배우들 모두 투표해봐라.”
명목 씨는 넋 빠진 표정으로 태우 씨와 영삼 씨를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태우 씨는 명목 씨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무대에 마구 올라가자는 사람 손 들어봐라.”
닭 날개를 많이 먹던 통통한 여학생이 주춤거리며 손을 들었다. 나머지 배우들 중에서도 두어 명이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됐다. 손 내리고, 무대 좌측 계단, 우측 계단으로 다니자는 사람 손 들어봐라.”
영삼 씨를 비롯한 나머지 배우들 모두가 우수수 손을 들었다.
“맹목이 행님, 투표 결과가 이렇습니더. 어떻게 하실랍니꺼?”
“야이, 새끼들아. 이거를 투표로 할 일이가. 내가 애초에 그런 거 정한 적도 없고, 정했다카더라도, 당시에 연극의 연자도 모르는 후배들 기강 잡자고 만든 건데, 그런 의미 없는 거를 지금까지 계속해서 답습한다꼬? 그게 말이가? 글이가? 이 빙신들아.”
“행님, 됐고예,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합니더. 그런데 행님 진짜 맹목이 행님 맞습니꺼?”
“알았다, 알았다. 너거들 좆 꼴리는대로, 알아서들 해라.”
명목 씨는 무대 중앙으로 뛰어 올라갔다. 위에 서 있던 후배들이 놀라서 우수수 물러섰다. 명목 씨는 잠깐 영삼 씨를 노려보더니, 무대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무대 뒷문을 통해 광장의 시계가 보였다. 늘 멈춰 있던 시계가 왠 일인지 또깍또깍 바늘을 움직여대고 있었다.
“어, 태우 행님. 밖에 동그랑땡 광장에 시계가 갑니더!”
“그래? 지금 몇 신데?”
“여섯시 이십구분인데예”
“아, 밥 묵을 때 됐네. 짜장면이나 시키라.”
태우 씨는 부서진 전화기의 잔해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고 배우들은 줄을 지어 착하게 무대의 우측의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영삼 씨는 핸드폰을 꺼내 중국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행님, 행님이 참았어야지예. 아, 참 행님도, 아아들 연극하는데 와 일일이 끼어듭니꺼?”
“마, 두환아. 들어봐라. 내가 그런 룰을 만든 적도 없는데, 내보고 만들었다카고, 아니, 만약에 내가 만들었다고치자 이기야. 그라모 내가 만든 거를 내가 바꾸면 안 되나? 그기 말이 되나? 투표로 한다꼬? 하, 참.나중에는 연출자도 투표로 뽑고, 동선도 투표로 정하고, 대사 치는 위치도 투표로 정한다 카겠네. 아니, 저것들이 연극을 아느냐 이기야.”
두환 씨와 명목 씨는 테이블 위에 닭 뼈를 쌓으며 소주를 비우고 있었다. 명목 씨는 이미 만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었고, 흔들리는 명목 씨 뒤에서 벽에 붙은 선풍기가 기름기 가득한 바람을 날려, 명목 씨의 곱슬머리는 볼썽사납게 앞으로 쏟아져 있었다.
“행님, 그만 하입시더. 오늘은 제가 살께예. 아줌마, 여기 얼맙니꺼?
“마, 두환이 새끼야. 니 앉아라.”
“아, 행님 그만 하자 하께네예.”
“두환이 이 새끼 많이 컸네. 행님 보고 그만 하자카고. 니가 지금 내한테 명령하나? 니 솔직히 말해봐라.니 옛날에 연극할 때, 완전 단역에다가 최고로 연기도 못하던 놈이, 이제 낫살 좀 처묵고 나니까 새끼야,선배도 안 보여? 내가 니 선배야, 이 새끼야.”
“아, 행님 많이 취하셨네.”
“이거 놔, 이 새끼야.”
두환 씨가 명목 씨의 팔을 붙잡아서 일으키려는데 명목 씨가 두환 씨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두환 씨가 뒤로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옆 테이블을 치는 바람에, 미처 치우지 않은 옆 테이블의 소주병과 음식 찌꺼기 들이 두환 씨 위로 쏟아졌다.
“아,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두환 씨가 벌떡 일어나서 명목 씨를 쏘아보며 말했다.
“행님, 내보고 뭐, 단역? 그러는 행님은 뭐 잘나서 연출 했소? 행님이 그 때 그랬지요? 극예술연구회의 정희 행님한테서 배워 왔다고? 내가 나중에 극예술연구회 가서 물어보니까 정희라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하던데예? 똑같은 겁니더. 행님이 없는 정희 행님을 만들어내서 우리들을 통제했던 것처럼, 우리도 맹목이 행님을 만들어서 후배들 가르치고, 그라면서 연극 무대는 올라가는 거 아입니까? 행님은 가만히 있으면,예? 굿도 하고 떡도 묵고 하겠구만, 굳이 일을 이래 만들어야 되겠습니꺼?”
두환 씨는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구두소리를 딱딱 내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명목 씨는 두환 씨가 나간 것도 모르고 혼자 테이블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먹다 남은 닭뼈와 치킨 무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 너거는 말이야. 김명목이가 아니라, 김맹목이가 필요했던거재? 맹목할 명목이 필요했구만. 맹목할 명목이... 이 김명목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맹목할 명목, 맹목할 명목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명목할 맹목이라 하다가 결국에는 맹목할 맹목이라고 할 정도로 명목 씨의 언어는 술에 짓뭉개졌다. 명목 씨는 한참을 혼자 앉아 있다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버지의 카드였다. 모르긴 해도 어제부터 날아간 카드 명세를 보며, 명목 씨의 아버지는 5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서울에서 닭중독에 걸려 돌아온 것이 아닐까 걱정이라도 하고 계실지 모를 노릇이었다.
창 밖으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눈은 얼어붙은 땅 위에 금방이라도 쌓일 것 같았다. 광장은 텅 비어 있었고, 학생 회관의 한 쪽 벽에는 제 9회 독일어 원어연극 ‘문 밖에서’ 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명목 씨는 도서관 휴게실 창문을 통해 학생 회관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빠야, 많이 기다렸나?”
경상도 억양에 경상도 어휘가 발랄하게 깡총거렸다. 명목 씨는 뒤를 돌아보았다. 뱃살이 통통한 후배, 신자 씨였다.
“와? 또 오빠야, 연극 생각하나?”
“연극은 무슨 연극, 그냥 담배 피고 있었지.”
명목 씨와 신자 씨는 손을 꼭 잡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명목 씨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는 행정법총론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몹시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고, 신자 씨가 앉은 책상 위에는 심한국사라는 만만찮게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따뜻한 스팀이 나오는 대학 도서관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꽤 평화로워 보였다.
두 사람이 그들만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사이에, 텅 빈 광장을 걸어 누군가가 소극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손에 간식거리를 잔뜩 넣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이미 얇게 쌓인 눈 위에 그 사람의 발자국이 보일 듯, 말 듯 찍히고 있었다. 그 사람이 소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배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아, 영삼이 행님! 안녕하십니꺼!”
물론 그 소리는 도서관에 앉은 명목 씨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명목 씨는 귀가 간지러운지 잠시 고개를 들어 귀를 판 후에, 다시 책상 위로 고개를 묻었다.
맹목의 탄생 - 2012년 습작 / 윤지원
등록안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