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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거련이 애써 침착하게 선에게 되묻는다.
“그게...무슨 말이냐?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말이로구나.”
“연나라는 흉년 때문에 많이들 굶어죽습니다. 근데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까지 받습니다. 또 위나라는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데, 화살받이의 대부분이 고구려 백성입니다. 태왕께서 진짜 옳으신 분이라면, 위나라를 때려 부수고, 연나라황제를 쳐 죽이고! 우리 고구려인들을 구해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참다못한 명림고보가 선을 향해 엄히 꾸짖듯...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구나. 진정 목이 달아나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이번엔 아불보구도 마찬가지로 선을 향해...
“네가 폐하보다 더 오래 고민해보았느냐? 네가 폐하보다 더 깊게 고민해 보았느냐? 대관절 무얼 안다고 감히 폐하께 그런 망발을 늘어놓는단 말이냐!”
고거련이 손을 들어 명림고보와 아불보구를 제지한다. 그리고 선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한데...계속 말해 보거라.”
“제가 오면서 보니! 고구려는 산도 뽑을만한 군사들과, 뽑힌 곳에 가득 메운다면...다시 산을 이룰 만큼의 식량이 있었습니다. 태왕께서는 정말...”
이윽고 고거련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지켜만 보는 분이십니다.”
결국 넘지 말아야할 선까지 넘어버렸고...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칭송하는 태왕, 하지만 그녀에게는 방관자이자 지독한 위선자로 느껴졌으니까.
“선. 태왕을 향한 모욕. 더는 못 참습니다.”
갈로맹광이 칼을 뽑아들어 선의 목에 겨눈다.
‘그래, 죽일 테면 죽여 봐!’
선이 눈물 그렁그렁한 두 눈을 부릅뜨고 고거련을 노려본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분노한 고거련이 갈로맹광에게 호통을 친다. 각부 귀족들과 대신들이 당황해하는 가운데, 갈로맹광이 서서히 칼을 아래로 내린다. 고거련이 겨우 화를 억누르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선을 향해...
“소리를 질러 미안하구나. 아...거처할 집이 필요하겠다. 갈로맹광. 그대가 책임지고 관청에 데려다주게.”
“알겠습니다...태왕.”
고거련은 다소 횡설수설하더니, 수행원들과 함께 도망치듯 황급히 안학궁성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분위기는 꽤나 가라앉았고...비단 동부의 대신들뿐만 아니라 서부도 마찬가지로 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고거련과 마찬가지로 궁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
선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풀려 땅에 주저앉고 만다.
“선. 태왕한테 고약하게 말합니다. 이제 통쾌합니까?”
“아닐 것도...없겠죠, 뭐.”
갈로맹광이 선의 머리에 꿀밤을 놓는다.
“아! 왜 때려요?”
“선. 따라옵니다.”
“왜요? 또 내 목에다 칼 갖다 대려고요?”
“선. 삐쳤습니까?”
“내...내가 뭘 삐쳐요.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건데.”
“선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집 없이 길바닥에서 잘 겁니까?”
‘길...바닥에서?’
“빨리 따라옵니다. 이러다 늦습니다.”
갈로맹광이 앞질러서 걸어가고, 선은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그를 뒤따라간다.
고구려의 수도, 안학궁성. 호수.
고거련은 주위를 물렸다. 혼자 있고 싶어졌으니까.
‘태왕께서는 정말 지켜만 보는 분이십니다.’
가슴이 아렸다. 선의 모진 말이 내심 서운하면서도, 그녀의 몰골 앞에서는 자신의 서운한 감정이 모두 무색해질 따름이었으니까. 고구려의 지배층, 그 중에서도 최고 권력자로서의 원죄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94년 전 고구려 지배층이 무능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졌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니 말이다.
문득 지난 회의 때 아불보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불보구는 분명 그리 말했다. 왜국과의 관계를 도모하고 그들의 신라침공을 묵인하면, 선대인 광개토태왕이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품은 신라 백성들의 안위는 어떻게 되냐고 말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이 신라와 백제를 동족으로 품은 진짜 이유는 남방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신라와 백제를 속국으로 삼아, 고구려의 위상을 높이고, 고구려 백성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그들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이는 태왕으로서 대외적으로 공표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고구려가 이로우려면,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가슴으로 품으려했으나 저들이 배반한 것으로 보이게끔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게 속국화하기 위한 선대의 술수가 되어버리면,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배신하고 서로 동맹을 맺은 행위, 이른바 나제동맹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고거련이 아불보구 때문에 화가 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분명 아불보구도 이러한 속사정을 알고 있을 텐데...’
분노까진 아니더라도 적잖게 짜증이 났던 고거련이지만...이내 그녀를 이해하려했다.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이니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옳고 그름을 운운하여, 상대방을 흔들고 깎아내리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백제와 신라를 속국화하기 위해 동족 운운했던, 선대이자 부친인 광개토태왕도 똑같이 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불보구의 의도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해도, 말 자체는 날카로운 글귀가 되어 마음속을 후벼 팠다. 이는 고거련의 천성 때문이리라. 말과 글이 무서운 이유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족, 신라, 짓밟힘’ 이 세 단어가 고거련의 마음을 심히 어지럽혔다. 굳이 가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만들었다. 하지만 고거련은 애써 불편한 감정들을 억눌렀다. 이 모든 게 고구려와 자국의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선은 경우가 달랐다. 그녀는 신라인이 아니라 고구려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배층의 무능 때문에 타국에 끌려갔던 고구려인 포로후손 말이다. 그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지배층의 탓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거련이 가장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거련이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연을 흡수 통일할 대전략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답을 할 수 없었다. 북연 흡수통일 그 기저에 고구려인 포로후손이 우선이었는지, 고구려의 국익이 우선이었는지를.
고구려의 국익보다도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이 우선이었다면, 선의 말대로 전쟁을 불사하여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들을 구해 와야 했던 것이니 말이다.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고구려인 포로후손의 이익보다, 나라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역시 고거련의 천성 때문인지...고작 열넷의 나이에 인생의 모든 역경을 경험한 선에게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구나...”
호수 속 물고기는 천하태평하게 입을 뻥끗거린다. 기포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 안학궁성 외각 관청.
나라에서 백성들을 위해 행하는 여러 복지가 있다. 일반 평민들이 교육시설인 경당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 중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귀화인들을 대상으로 대가없이 초가집을 지어주는 것이다.
선도 고구려인 포로후손이지만 어찌 보면 귀화인이기도하기에, 초가집을 지어달라고 관청에 요청하러 가는 것이다. 근데 오늘따라 요청하는 귀화인들이 제법 많나보다. 줄이 엄청 길다. 선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갈로맹광의 얼굴엔 짜증이 한 가득이다.
“바쁘시면 가세요.”
“안 됩니다. 태왕이 그랬습니다. 책임지라고.”
“또 태왕...”
“나 이해 안갑니다. 선, 왜 그렇게나 태왕 싫어합니까?”
“제가..뭘...어찌 했다고...”
“선 아까 행동.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솔직히 숙군성에서 평양으로 올 때까지, 하나 같이 태왕의 칭찬뿐이었습니다. 허나 제게는 위선자이고, 방관자일 뿐입니다.”
“나 이해 안갑니다. 왜 아까부터 자꾸 위선자, 방관자 운운합니까?”
“별로...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 합니다! 왜 그러는 겁니까, 도대체!”
“말하기 싫다고요.”
“선, 말해야 합니다! 태왕이 왜 위선자입니까?”
결국 참다못한 선이 욱하는 심정으로...
“그토록 많은 힘을 가지고도 우릴 구하러 오지 않았으니까요! 연나라에는 아직도...우리 어머니...아버지가...살고 계시니까요.”
갈로맹광은 울먹거리는 선을 바라보며 또 다시 고민에 빠진다. 북연 흡수통일이라는 고거련의 대전략을 선에게 말해줘야 할지 말이다. 왜냐하면 대전략 자체를 선이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 차차하더라도, 괜히 헛된 희망만 안겼다가 실망하게 만들 것 같기 때문이다. 북연에서 고구려인 포로후손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결국...
“선.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십시오. 왜 갑자기 말을 아끼십니까?”
“나 할 말 없습니다. 선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뭐야...방금 전에 막 몰아붙일 땐 언제고, 자긴 아무 말도 안 해.”
선이 계속 구시렁거리지만 갈로맹광은 묵묵부답이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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