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연의 수도, 용성. 

 모용 성씨를 비롯한 지배계급의 선비족과 재주를 인정받은 한족들이 모여 사는, 소위 황금씨족들의 거주 지역이었다. 또한 각국의 상인들의 교류의 장이었을 정도로 화북지역의 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용성의 기운도 급격히 쇠락해져갔다. 고위 귀족들과 지식인들, 상인들 상당수가 다른 나라로 빠져나갔다. 서쪽의 북위로, 동쪽의 고구려로, 머나먼 남쪽의 송으로. 그 빈자리를 용성으로 피난 온 가난한 백성들이 대신했다. 그런데 피난 온 백성들마저 풍홍이 황제가 되고난 후로 고구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폭군 풍홍은 국경 봉쇄를 강화하고 다른 나라로, 특히 고구려로 도망치는 백성들을 참수하고 저잣거리에 효수하였다. 외부로 빠져나가려는 백성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그 가운데에도 경계병들에게 뇌물을 주고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경계병들에게 배신당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에게 뇌물을 주었다하더라도, 고구려와의 국경지역에 살고 있는 짐승에게 잡아먹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고구려로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선의 부모. 북위와의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선의 아비는 자신의 모습을 희화화하여 밥벌이 및 푼돈이나마 재물을 모았고, 말을 못하는 선의 어미는 허드렛일을 하여 재물을 모았다. 경계병과 그 지휘계통에 있는 윗선들에게 줄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마저 잘라 팔았다. 

 ‘보기 흉하다.’ 

 거울도 사치품인 시대라, 계곡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흐느끼던 선의 어미. 하지만 이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선을 떠올리며 울음을 멈춘다. 그리고 딸이 반드시 살아 돌아오기를 갈망한다. 온갖 고생과 수모를 다해 재물을 모았는데, 정작 선이 죽으면 모든 게 다 헛수고이기 때문이다.

 ‘선아. 제발 살아 돌아와 다오. 네가 죽는다면 난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 

 이때 누군가가 선의 어미에게...

 “스님...용성으로 가는 길이 이곳이 맞습니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인데? 그나저나 스님? 아...민둥산이 된 내 머리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선의 어미가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는데...자신에게 스님이라고 부른 사람의 정체가 바로, 전쟁을 치르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 자신의 딸 ‘선’임을 알게 된다. 

 ‘정말 다행이다. 살아 돌아 와줘서.’

 한편 선은 익숙한 얼굴이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여인 때문에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근데 마주하는 상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게 되자, 이내 자신의 어미임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선은 자신의 어미에게 수화로...

 ‘어머니...맞죠?’

 ‘선아...’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런 모습을...’

 ‘너는 어찌 혼자 온 것이야...이 몰골은 또 뭐고.’

 ‘저희가 졌어요...거의 다 죽었고, 저 혼자 도망쳤어요. 무작정 달려왔어요.’

 미어지는 가슴 때문에 할 말을 잃은 선의 어미, 한동안 선을 바라보다가 결국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딸을 바락 끌어안는다. 

 ‘어머니...’

 선은 그간 참아온 설움이 터져 나와, 어미와 함께 소리 내어 운다. 그러다가 민머리가 된 어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오늘 둘이 나눌 대화가 제법 많을 것 같다.

고구려의 숙군성.

 요하(지금의 랴오허 강)의 서쪽...광개토태왕 대에 이르러 새로이 편입된 영토이며, 북연의 수도 용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천하의 전략물자라 할 수 있는 군마가 충분히 먹고 자랄 수 있는 초원을 품고 있고, 용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유사시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북연 유사시’가 고거련의 대전략에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그 때문인지 보병, 단수장창병, 궁수, 부월수, 경기병, 철기병 등의 숙군성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훈련에 임하고 있다. 

 전방에는 보병, 단수장창병, 궁수, 부월수가 배치되어있다. 후방에는 경기병과 철기병이 배치되어있다. 먼저 후방에 있던 경기병이 앞으로 치고나가 수십 개의 훈련용 목책을 타격한다. 

 그 틈에 보병과 단수장창병, 부월수, 궁수가 대오를 갖춘다. 이후 경기병이 후방으로 빠지면, 궁수가 훈련용 목책을 향에 화살을 쏜다. 격발을 마친 궁수들이 재장전하는 사이에 철기병이 앞으로 치고나가 훈련용 목책을 타격한다. 이후 철기병이 후방으로 빠지자, 숙군성의 성주가 큰 소리로 ‘돌격 개시!’를 외친다. 이에 보병과 단수장창병, 부월수가 대오를 갖추어 전방으로 돌격, 훈련용 목책을 타격한다.  

 이 모든 걸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바로 숙군성의 성주, 고구. 46세의 여인이며 고구려의 태왕 고거련의 누이이다. 광개토태왕 시절, 북연의 전신인 후연과의 전쟁에서 숱한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이다. 여인으로는 드물게 6척에 육박한 장신이며, 왼쪽 뺨에 화살촉이 스쳐지나간 듯 보이는 흉터가 새겨져있다.

 고구의 옆에는 감찰관 자격으로 온 갈로맹광이 서있다. 그렇다. 갈로맹광이 고거련의 명을 받들어 향한 곳이 바로 숙군성이었던 것이다.

 “성주. 대단합니다. 이 군사들로 뭐든 할 겁니다.”

 “과찬이시오.” 

 “과찬 아닙니다. 과연 국경답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나저나 연(북연)과의 접경지역 야간순찰, 오늘은 이 사람도 직접 나갈 생각이오. 감찰관께서도 함께 가보시는 게 어떻겠소.”

 “야간순찰? 아! 나 들었습니다. 연나라 백성들. 고구려로 엄청 도망칩니다.”

 “그전에는 꽤나 있었으나, 연(북연) 황제 풍홍이 국경을 봉쇄한 후로 탈출에 성공한 자는 없소.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순찰 횟수를 늘렸지만...성과는 없는 실정이외다.”

 갈로맹광의 시야에 자책하는 마음 때문인지 안색이 어두운 고구의 얼굴이 들어온다. 

 “성주. 나! 행운, 좋습니다. 성주에게 특별한 날, 만들어줍니다.”

 “그대의 행운이 한 목숨을 살릴 수 있길 바라겠소.”

북연의 수도, 용성.

 북연군의 말먹이로 빼앗겨, 반쯤 볏짚이 날아간 선의 초가집. 몸이 불편한 아비와 말 못하는 어미를 납두고 혼자 고구려로 도망치라는 부모. 선은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저 혼자 고구려로 도망치라고요?”

 “그래, 아버지가 알아봤는데, 오늘 보초서는 병사가 뇌물이 먹힐 만한 작자더라고. 오늘 당장 떠나는 게 좋겠다.”

 “싫어요...못 떠나요...”

 “이 아비는 네가 나 대신 전쟁터에 끌려가는 거, 이제 더 이상 못 본다. 아비와 어미 말대로 따라.”

 선은 그간 다리가 없는 아비를 대신해 전쟁터에 나갔던 것이다. 선이 대신 나가지 않았더라면 다리 없는 아비가 전쟁터에 끌려가 죽었을 테니까.

 ‘이 어미는 네 이마에 불도장이 찍히거나, 위나라(북위)에 끌려가 노예로 사는 거...절대, 절대 못 본다. 어서 고구려로 가거라.’

“저보고 평생 불효녀로 살라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이나 해보셨어요?”

 “너는 우리 마음 생각이나 해봤어? 네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이마에 불도장이 찍힌 채로 평생을 살거나, 노예로 살게 되면...그리...살게 되면...이 아비와 어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아버지...”

 “너도 이렇게 살기 싫잖아. 신물이 나잖아. 고구려로 가면 집도 나라에서 지어주고, 자식들 교육도 대가 없이 해준대. 일할 거리도 많고. 전쟁도 없대! 그니까 여기보다 훨씬 좋을 거야. 너도 사람답게 살고 싶잖아. 아니야?”

 선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본심이, 이젠 사람답게 살고 싶다 말하고 있으니까. 

 ‘내 나이...고작 열넷이라고.’

 하지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몸 불편한 아비와 말 못하는 어미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 선의 좀 더 솔직한 심정은, 고작 열 네 살 뿐인 자신에게 이런 잔인한 선택지가 놓인 현실 자체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어서 가! 이러다 늦겠다.”

 “싫...어요...”

 이때 선의 어미가 뾰족한 무언가를 자기 목에 갖다 댄다.

 “부인...”

 “어머니!” 

 선의 어미가 남은 손으로 문을 가리킨다. 

 “어찌 이러세요, 진짜.”

 선의 어미의 목에 실금이 그어진다. 실금에 핏방울이 맺힌다. 

 “선아. 어서 가거라. 어서.”

 “아버지까지 왜 그러세요. 제가 어떻게 혼자 간다고.”

 “네가 계속 고집피우면 이 아비도 죽을 거다. 부모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어서 가!”

 선의 어미 목에서 핏방울이 맺히는 걸 넘어 핏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죄송해요...”

 결국 선은 부모가 챙겨준 채비와 경계병에게 줄 뇌물, 얼굴을 가릴 갓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이윽고 방안에 덩그러니 남은 선의 부모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

같은 시각. 

 완전무장한 고구와 갈로맹광, 보병 위주의 백여 명의 순찰대가 숙군성을 빠져나온다.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군기가 엄청납니다. 성주. 이곳에서 엄청 무서운 사람인가 봅니다.”

 “조간(朝刊)에 순찰하는 병사들이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신을 수습해오는 일이 잦소.”

 “시신이라면...”

 “맞소. 연나라에서 탈출하려다 실패한 백성들이오.”

 “이런...”

 “병사들은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리고 있소. 하여 장난으로 작전에 임할 수가 없는 것이오.”

 갈로맹광이 병사들의 표정을 살핀다. 일개 병사들의 눈빛이라기엔 너무도 강렬하다. 탈출하는 북연의 백성들을, 특히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갈로맹광도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잡담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