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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만의 여유로운 저녁인지 모르겠다.
공연 연습이 없는 날, 그녀와 약속을 잡을 수 있는 날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예전처럼 아무 때나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길거리를 걸으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오빠, 여기 앉자!"
그녀는 익숙한 카페 창가 자리로 가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마지못해 따라가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먼저 달려가서 자리를 맡고, 그녀가 올 때까지 메뉴를 골라놓았을 텐데.
“뭐 마실 거야?”
나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익숙한 메뉴를 골랐다.
“아메리카노. 오빠는?”
“나도 그냥 아메리카노.”
짧은 대화였다. 이전 같았으면 그녀가 ‘오늘은 특별한 거 마셔볼까?’ 하며 장난스럽게 굴었을 텐데.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나게 이야기했을 텐데, 요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은 학교 어때?"
괜히 던진 질문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지쳐 보였다.
"음… 그냥, 정신이 없지 뭐. 과제도 많고, 시험도 슬슬 다가오고… 솔직히 벅차긴 해."
그녀는 피곤한 듯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아니, 불안했다.
"그래도 나랑 만나는 건 힘들진 않지?"
그녀는 내 말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
"힘든 건 아닌데… 조금 버거울 때는 있어."
그 순간, 속이 서늘해졌다.
“버거워…?”
내가 되묻자, 그녀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냥… 요즘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게 많다 보니까, 그런 거지. 오빠랑 만나고 싶어. 그런데 가끔은 시간이 안 맞아서 속상할 때도 있고…”
그녀의 말은 더 이어졌지만, 머릿속은 ‘버거워’라는 단어에서 멈춰 있었다.
'그럼 나랑 만나는 게 그녀에게 부담이 되고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변함없이 애정을 표현했지만, 나는 그녀가 예전보다 연락이 뜸해지는 게 신경 쓰였고,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는 날이 많아지는 게 불안했다.
‘학교에서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이해하려 해도, 감정이 따라주지 않았다.
"미안."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냥… 요즘 내가 좀 집착하는 거 같아서."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오빠가 나한테 관심 많고, 걱정해 주는 거 너무 고마워. 진짜로. 근데, 오빠도 알잖아. 난 오빠를 좋아해. 그런데 요즘 오빠는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아."
그 말이 나를 깊이 찔렀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오빠는 왜 자꾸 불안해하는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가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가 학교 생활에 집중하는 게 당연한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걸까.
이렇게 계속 옭아매면, 결국 그녀도 지쳐 나를 떠나게 되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먼저—
그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볼게. 내일 수업 준비해야 해서."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붙잡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조심해서 가."
그녀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카페 문이 닫히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텅 빈 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아직도 그녀가 앉아 있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가 방금 전에 잡았던 자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그녀는 이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거리를 좁힐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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